서울도 LA도 아닌 포르투갈 리스본의 택시 안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노래 ‘아파트’는 대서양 바람에 실려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울렸다.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함께 부른 그 노래의 한 구절 “이곳엔 모든 게 완벽한데, 나만 비어 있어”는 단순한 사랑 노래의 가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 도시 거주자들이 매일 밤 품게 되는 감정의 언어다.
서울과 LA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 서울은 위로 자랐고, LA는 옆으로 번졌다. 하늘을 향해 쌓아 올린 재개발 초고층 아파트 단지와 프리웨이로 연결된 광활한 교외화의 도시 블록은 각각의 논리로 확장되었지만, 두 도시는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은 많지만 관계는 없고, 도시는 완성되어 가는데, 삶은 점점 더 얇아졌다.
서울의 ‘무교동’ 골목이 초고층 복합업무용 오피스텔로 대체될 때, 그 골목 안의 작은 해장국집과 오래된 이웃들의 인사는 함께 사라졌다. 재개발 정책은 건물의 노후도를 기준으로 삼지만 건물이 낡았다고 해서 그 안에 깃든 삶까지 낡은 것은 아니다. 철거와 재건축은 언제나 ‘더 나은 환경’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에는 공동체의 기억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국의 재개발 정책은 오랫동안 현대화와 경제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아왔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용적률 완화, 사업성 중심의 정비구역 지정 - 이 모든 제도적 언어는 공간을 자산으로 환산하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수퍼블록으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는 내부에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그 완결성은 도시와의 연결을 끊고 있다. 단지 바깥의 거리는 사람이 머물 이유를 잃고, 도시의 보행 생태계는 서서히 죽어갔다.
LA의 다운타운 ‘아츠 디스트릭트(Art District)’ 재생 역시 다르지 않다. 고급화(gentrification)라는 이름의 재개발은 오래된 물류창고 위주의 낡은 블록들을 유리와 철골로 지은 럭셔리 콘도와 카페 구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이민자들의 공동체, 저소득층인 라틴계, 흑인, 그리고 아시안계의 오래된 거주지, 도시의 비공식적인 활기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밀려났다. 아트 갤러리와 젊은이들이 모여 파티를 여는 힙한 공간이 들어섰지만 그곳을 채우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이벤트 행사를 즐기는 젊은이들이다.
오늘의 서울과 LA에서는 시스템의 논리-자본, 행정 효율, 부동산 가치-가 일상의 삶과 기억을 잠식하고 도시 공간은 점점 더 ‘부재(不在)’의 상태로 남겨졌다. 건물은 새것이지만 그 안에 살아야 할 공동의 이야기는 사라져 버렸다.
서울 아파트의 층과 층 사이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살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짧은 침묵이 관계의 전부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벽은 얇지만 마음은 닿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반복해서 고층 아파트의 고독한 내부를 배회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포착한 것은 단지 일본 사회의 특수성이 아니라, 현대 도시인의 보편적인 내면 풍경이다. 아파트는 이제 물리적 주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고립과 비자발적 침묵이 구조화된 공간이다.
루이스 멈퍼드는 의미를 잃은 도시를 ‘네크로폴리스’라 불렀다. 살아 있는 인간이 거주하지만, 삶의 온기가 사라진 도시. 재개발의 언어는 늘 ‘환경 개선’과 ‘도시 경쟁력’을 말하지만 제인 제이콥스가 소중히 여겼던 ‘보도의 발레’-거리에서의 우연한 만남, 익명의 이웃들이 나누는 무심한 눈인사-는 설계도 어느 구석에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 있는 장면들이 있다. 서울 성수와 익선동의 좁은 골목, LA 코리아타운의 밤거리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이 공간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 계획의 논리가 미처 닿지 못한 틈새에서 삶은 자생한다. 도시는 완성될 때 죽는다. 균질한 아파트 단지와 완벽하게 정비된 대로는 오류를 제거하지만 동시에 삶의 여지도 제거하고 있다.
두 도시 재개발 정책이 바꾸어야 할 것은 설계의 수준이 아니라 설계의 철학이다. 용적율, 주차, 수익률이라는 언어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더 자주 마주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한다. 도시는 이동의 공간이 아니라 머무름의 공간이어야 한다. 관계가 가능했던 조건-그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했던 골목과 모퉁이의 기억들-을 정책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다.
“이곳엔 모든 게 완벽한데, 나만 비어 있어.” 이 노래의 가사는 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오늘의 도시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백처럼 들린다. 서울과 LA의 야경은 눈부시게 빛나지만, 그 빛은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도시가 다시 살아 있는 장소가 되려면 완벽함 대신 불완전함을, 속도 대신 머무름을, 성장 대신 관계를 택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건물의 높이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숨 쉬던 삶과 기억, 그리고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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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성 LA 포럼 회장·도시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