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꽃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기에 청혼할 때도 축하할 때도 제일 선호하는 선물은 꽃다발이나 화환이다. 나 역시 꽃 선물을 많이 받았다. 갓 마흔이 된 어느 생일에는 붉은 장미 100송이도 받아봤다. 그날 꽃바구니 앞에서 엄청 감격하긴 했지만, 꽃송이의 숫자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이 많은 꽃이 시들고 냄새나서 버릴 때의 기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물이 썩어가는 냄새와 눅눅하게 녹아내리는 줄기가 쓰레기통으로 향할 때, 나는 고개를 숙인 꽃대 위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를 떠올린다. 그들은 탐스러운 과일을 그릴 때도, 화려한 꽃을 그릴 때도 캔버스 구석에 슬그머니 시든 꽃이나 해골, 시계, 꺼져가는 촛불 등을 배치한다. 아름다움의 덧없음, 죽음,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생명은 촛불처럼 꺼져버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화가는 라틴어로 ‘허무’와 ‘덧없음’을 뜻하는 이 바니타스 정물화를 그리며 묻는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영원한가?’ 그것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도취된 네덜란드 상인이나 부유한 시민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지금 네가 누리는 이 찬란한 부귀영화도, 터질 듯한 젊음과 아름다움도, 결국 저 꺾인 장미처럼 순식간에 시들어질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경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준엄한 메시지다.
돌이켜보면 나의 사십 대, 붉은 장미 100송이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던 그때는 내 생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을지 모른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거울 속에는 그 시절의 싱싱함 대신 겹겹이 잔주름을 새긴 내가 서 있다. 시간은 붙잡을 수 없이 흘렀고, 세상이 말하는 영광은 꽃병 속 장미처럼 소리 없이 시들어 갔다. 젊음도, 열정도, 너무나 소중할 것 같았던 세상의 명예도 결국은 모두 덧없는 연기처럼 흩어지는 바니타스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 퇴락을 결코 슬프거나 허무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나의 아이들, 할머니라고 불러주는 손주들. 내 생명의 끈을 잡고 태어나서 더 튼튼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 바니타스 그림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진실은 허무주의나 비관이 아니라고. 꺾인 꽃은 시커먼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지만,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린 장미는 시든 꽃잎을 떨구어 스스로 거름이 된다고. 인간의 세대가 끝없이 이어지듯이 다음 봄의 봉오리를 준비한다고.
결국 그 시절의 화가가 정물화 구석에 숨겨둔 해골과 시든 꽃은 ‘어차피 끝날 인생이니 마음대로 살라’는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니, 지금 네 곁에 있는 이들의 손을 한 번 더 잡고, 오늘 하루를 더 뜨겁게 사랑하라는 다정한 다독임이다. 젊음도, 사랑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도 유한하기에 아름답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축제이자 기적이다. 내일 시들 장미를 걱정하며 오늘을 낭비하기보다, 지금 내 앞에 피어난 삶이라는 꽃을 마음으로 껴안고 싶다. 메멘토 모리, 그 경고를 되뇌며 오늘이라는 단 한 번뿐인 시간을 더욱 간절하게 살아내리라 다짐해 본다.
바니타스 그림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닐까.
“죽음을 기억하라. 그래서 오늘을 더욱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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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수필 평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