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어리 없는 사르데냐, 올리브 열리는 서귀포

2026-05-27 (수) 12:00:00 오세호 이딸리네아 대표· 푸드앤와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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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거대한 섬 사르데냐(Sardegna)는 그 이름 속에 정어리(sardine)의 기원을 품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곳에서 풍부하게 잡혔던 작은 물고기가 섬 이름을 '사르데냐'로 불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온난화로 지중해 수온이 오르자 차가운 물을 좋아하는 정어리 떼는 북쪽으로 떠났다.

이름은 남았지만 실체는 멀어진 지 오래다. 식재료 지도의 재편은 인류사에서 반복되어 왔다.


한반도 상황은 더 극적이다. 명태의 고장 고성 명태축제에 등장하는 명태의 96% 이상은 러시아 수입산이다. 수온 상승으로 명태 서식지가 북상한 결과다. 사과 산지가 강원도 최전방까지 올라가고, 제주 서귀포에선 아열대 작물이 이미 상업 재배 궤도에 올랐다. 이름은 그 자리에 있지만 실체는 떠난 지 오래다.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은 서귀포의 올리브 나무다. 전통 산지인 유럽이 가뭄과 고온으로 위기를 맞는 사이, 서귀포의 온화한 해풍이 새로운 테루아(토양)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직접 찾은 서귀포 올리브 농장의 현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적은 생산량과 들쭉날쭉한 품질 속에서 관상용으로 간신히 버티는 게 실상이다.

20년은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 나무 앞에서 당장의 지원 없이 버틸 재간은 없다. 100년 역사의 일본과 수백 년 노하우의 유럽을 따라가기에 20년의 인내는 농가에 비현실적인 사치다. 복잡한 규제와 서류 작업도 소규모 농장에는 거대한 벽이다.

그럼에도 수확 직후 짜낸 생생한 오일을 이곳에서 곧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흥미로운 기대를 품게 한다. 척박한 현실을 뚫고 지중해의 여러 품종이 이미 서귀포 땅에 깊게 뿌리를 내렸다.

여러 지역 축제들이 이름만 남긴 채 실체를 잃어가는 동안, 서귀포 올리브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조용히 써 내려가고 있다. 머지않아 지중해와는 또 다른, 한국적 지리 정체성을 획득한 올리브오일이 탄생할 가능성이 제주 땅에서 조용히 익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고정된 명칭이 아니라, 변화한 땅이 선사하는 최선의 맛이다. 이름이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땅이 새로운 이름을 길러낸다. 다만 그 환대는 낭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농가가 버틸 수 있는 현실적 조건과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규제의 문턱도 낮아져야 한다. 변화를 설계하기 전에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 이동하는 테루아가 선사할 새로운 미식 시대를 준비할 때다.

<오세호 이딸리네아 대표· 푸드앤와인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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