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로터리] 대타 연주자가 홈런을 치는 순간

2026-05-14 (목) 01:35:23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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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라는 게임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일까. 많은 이들이 9회 말 2사 만루,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등장한 ‘대타’가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터뜨리는 순간을 꼽을 것이다.

이런 극적인 반전은 비단 녹색 다이아몬드 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계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른바 ‘대타 신화’가 존재한다.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1943년, 당시 25세의 무명 보조 지휘자였던 그는 거장 브루노 발터가 공연 당일 아침 갑작스러운 독감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리허설 한 번 해볼 시간조차 없었던 번스타인은 정장을 빌려 입고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 공연은 CBS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됐고 그는 복잡한 악보를 완벽하게 해석하며 하룻밤 사이에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시대는 그렇게 ‘대타’의 순간에서 시작됐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2017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의 아시아 투어를 앞두고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는 랑랑이 왼팔 부상으로 하차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인물이 바로 조성진이었다. 이미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이름을 알린 그였지만 베를린 필과의 협연은 차원이 다른 무대였다.

그는 단기간에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을 완벽히 준비해 무대에 올랐고 베를린과 서울을 잇는 이 투어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단번에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사례로는 2023년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를 들 수 있다. 그는 카네기홀 공연을 앞두고 거장 우치다 미츠코가 갑작스럽게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하게 되자 불과 24시간 만에 대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모차르트 해석으로 기립박수를 끌어내며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어떻게 찾아오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지난주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본래 협연하기로 했던 피아니스트 알리스 사라 오트가 손에 이상이 생겨 갑작스러운 수술을 받게 되면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지휘자로 활동 중이던 김선욱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는 피아노를 치며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플레이 컨덕터’로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협연자와 지휘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이 고난도의 무대는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정점과 지휘자로서의 새로운 도전을 병행하며 쉼 없이 정진해 온 그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준비된 성공’이었다. 객석에서는 대타에 대한 아쉬움 대신 뜻밖의 행운을 만난 관객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흔히 이런 성공 신화를 ‘천재일우의 기회’에서 찾는다. 무릇 기회는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스쳐 지나갈지 모르나 그 기회를 낚아채 승리의 홈런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준비된 자’뿐이다.

야구의 대타가 벤치에서 수천 번의 빈 스윙을 하며 몸을 데우고, 무명의 연주자가 악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연습실의 불을 밝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그 단 한 번의 ‘별의 순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다.

결국 이런 일은 표면적으로는 우연 같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성실함이 빚어낸 필연에 가깝다. 대타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살려 성공 신화를 쓰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우리 삶에 큰 축복이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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