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5년이라는 세월

2026-04-27 (월) 12:00:00 전지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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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주는 무게감. 무겁고 길고 지루하다. 우리 둘의 모습은 그 안에 자리한다. 연분홍 청춘을 지냈고, 푸름이 만개했던 숲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제 산마루에서 내려 가는 길을 조심스레 걷는다. 눈 앞에 보이는 단풍나무 색이 곱기만 하다. 함께해서 좋았던 기억들, 아프고 힘들었지만 잘 견디어 냈던 인생 여정의 구비들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마주본다.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 사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비빌 언덕이 없었던 유학생 시절이 그랬고, 공부가 끝나고 장사를 시작할 때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틀리지 않았다. 인생여정은 언제나 일방 통행이다. 돌아 올 수 없는 길. 한번도 가보지 못 한 길만 그렇게 놓여 있을 뿐이다. 뒤돌아보면 시행착오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올 해의 결혼기념일은 마침 성주간에 이어져 있었다. 며칠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서 였을까, 감기 몸살이 찾아왔다. 온몸이 무겁고 기운도 없다. 잔기침에 목소리는 완전 허스키. 말 소리만 들으면 무슨 중병이라도 걸린 것 같다. 결혼기념일이면 붉은 장미 꽃다발을 받아야 하고,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가야하고,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으며 와인 잔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식이 완전히 깨졌다. 장미꽃 아름드리로 사오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시들어지는 내 모습 같아서 싫다며.


감기약 먹고 자고, 일어나면 뜨거운 차 한 잔에, 뜨거운 숭늉 한 그릇 마시고 또 돌아 눕는다. 2박3일을 자고 또 자고, 너무 누워있어 허리가 아프다. 며칠 후 겨우 방 밖을 나와 부엌을 살핀다.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냉장고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하기를 몇 번. 또 눕는다.

살면서 이런 게으름의 호사를 누려본 것은 언제 였던가. ‘쉬어가라’는 그분의 뜻인 것 같아 그야말로 코가 노랗게 빈둥거렸다. 독서도 않고, 성경 필사도 쉬고, 이러닝의 수업도 미루어 두고, 사목회 수첩도 넘겨보지 않았다.

결혼기념일, 그것도 45주년. 긴 세월 함께했다. 살다보니 여기까지 와있네, 하는 느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더 잘 한 것이 없었던 시간들. 그 안에 우리는 주름진 손을 다정히 잡고, 굽은 등을 바라보며, 갈라진 뒷꿈치를 숨기지 않고, 언덕 위에서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함께하는 어느 날’ 중의 하루. 많이 고맙고 또 감사하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못했고, 장미꽃 다발을 거절했고, 여행을 못갔어도 오늘 이시간 손잡고 있음만 감사하면 안되는걸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념일. 이런 날도 있어야 한다고, 45년의 세월 나쁘지 않았다고, 잘 살았다고.

연분홍만 청춘이던가? 가슴에 피는 따뜻한 꽃도 만개하면 그 향기 그윽하고 오래 오래 가더라고..

<전지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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