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리다 한인박물관 정문앞에선 황 목사의 후손들. 왼쪽부터 황사선의 손녀 게일, 페기, 황사용의 손녀 로리, 바네사.
황사용 목사 , 1909년 메리다에 한인감리교회 설립
이번 후손 방문은 역사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증명
척박한 땅에 공동체를 세운 믿음의 역사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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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서 파견한 방화중은 장로교 전도사, 황사용은 감리교 전도사였는데, 1909년 5월의 기록에 의하면 메리다에 세워진 교회는 감리교회였다. 그 감리교회는 1921년까지 존속하다가 한인 이민자들이 멕시코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안식교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다른 한 뿌리는 쿠바로 건너가 엘 볼로라는 도시에서 한인 감리교회를 세우고 미국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목회하다가 공산화가 되던 1959년 문을 닫게 되었다. 어쨌든 초기 감리교 정착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황사용 선교사였음을 말해야 한다.

멕시코 유까딴을 방문한 황사용,황사선 목사의 후손들이 조남환선교사가 운영하는 멕시코선교센터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맨 앞이 Dayan Lee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황사용 선교사는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을 유까딴에서 사역했으니 장기 선교사로 분류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공식 기관인, 국민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해외에서 해외로 파송된 역사적 사례이며, 단순히 국민회 지부 설립만을 위해 전도사 두 명을 파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국민회와 교회 사역을 함께 감당하기로 하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방화중의 조기 귀환으로 그 사역의 무게가 황사용에게 집중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한민보에 실린 황사용 관련 글들은 그가 유까딴에 와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못하면서 사역했는가를 보여준다.

메리다 한인 후예 청년들과의 작은 모임에서 페기의 춤 시연

황 목사 후손들이 멕시코 유까딴에서 조남환 선교사(가운데)와 기념촬영
“황사용이 유까딴에 온지 근 1년이 되도록 각처 동포들을 심방하느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 하루라도 편한 숙식을 못해 무릎에 종기가 생겼다. 깜페체에 갔다가 몸살이 나 다시 밤에 배를 타고 풍파를 무릎 쓰고 배를 타고 씨호라(? 씨우닫 델 까르멘 으로 추정/ 이유는 프론테라 쪽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을 것이고, 배를 타고 도착하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된 곳) 하는 지방에 도착, 마침 그 지방에 유행하는 열병에 감염되었으나 약도 없고,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다. 동행하던 재무위원 김윤원의 통신으로 지방에 있는 청나라 사람이 약과 재료를 상당수 사용하여 치료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외교원 이업동을 보내려고 하는 때에 국민회 총회에서도 약값으로 미화 10원을 보냈다.” (신한민보 1909년 9월 22일) “지방회의 재정 10월 재정 보고는 사무원 신광희 월급 20원, 외교원 이업동 월급 18원, 회관 집세 10원, 황사용 약값 2원 50전,”(1909년 11월 24일자) “그리고 황사용은 작년 4월 18일에 메리다에 도착해 근 9개월의 힘든 사역을 마치고 1910년 1월 11일 메리다를 출발해 같은 달 27일 무사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멕시코 시티에 자리를 잡은 이준혁은 당시 백인 상점에서 사무를 보는데 월급도 후할뿐더러 신용이 특별하여 3-4 동포도 도와주고 있는 동시에 황사용의 여비도 많이 도왔다고 했다. 황사용의 권고로 이덕순과 이준혁과 치후와하에 거주하는 이춘경 등은 같은 해 1월 29일 자로 상항 지방회에 입회하였다. 황사용은 2월 6일(일요일) 상항 한인교회에서 멕시코 한인 정황과 시찰한 이야기를 연설했다. 이날 그의 멕시코 한인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열심이어서 당장 모금이 약속되고, 청년회는 멕시코 한인교회를 위해 매달 얼마씩 돕기로 결의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돌아온 후 신병이 떠나지 않으나 동포들을 심방하는 일을 계속하므로 라성의 중국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신한민보 1910년)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을 미국으로 재이민 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하와이를 돌며 이들의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위해 상당한 재물을 후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모금했으나 재이민이 불발로 끝나 모두 돌려 주기도 했다.
그는 1914년에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하고 초대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의 동생 황사선 목사, 그의 4촌 처남이었던 임정구 목사(오클랜드 교회 2대 담임목사), 그리고 그의 여동생 황혜수도 선교사와 같은 삶을 살았다. 황사용 목사의 손녀딸인 바네사와 황사선 목사의 손녀 딸인 게일은 여전히 오클랜드에 살고 있다. 손녀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흥사단 활동을 하고, 독립운동과, 교회를 개척하며 평생을 지내다 보니, 가족에 대해서는 소홀했다고 한다. 자신을 공동체에 헌신하는 대가로 가족들은 힘겨운 세월을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번 황사용 후손의 방문은 역사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1905년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의 역사는 흔히 ‘노동 이민’으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인 조직과 신앙 공동체를 함께 세우려 했던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한인 이주 12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이 역사를 선교의 관점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유카탄 한인 이주 120주년은 단순한 이민의 기념이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공동체와 교회를 함께 세우려 했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민 역사의 한 자락을 넘어 선교 역사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하는 자리이다. 이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할 때, 오늘의 디아스포라 선교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유까딴 선교센터에서 황사용 선교사님의 후손 (손녀, 조카 손녀)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지난 역사를 재생하는 시간은 축복이었다. 2029년이면 선교 120주년이기에 의미가 깊다. 유까딴 1호 한인 선교사, 혹은 해외 한인 3호 선교사에 자리매김해야 하는 분들에 대한 역사와 사역, 정신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는 일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선조들의 역사를 재생하는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자료와 선교사 역사를 발굴하고 계승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장로교단의 선교 역사에는 방화중이 첫 번째 해외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유카탄 한인 후손 4세대인 Dayan Lee의 헌신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는 자료를 수집하고 계보를 정리하며, 사비를 들여 후손들을 한국과 유카탄으로 인도하고 있다.
선교사는 초기에 선조들이 걸었던 그 고뇌의 길을 온전히 이해할 자격이 없을지 모르나, 30년 넘는 세월 동안 유카탄에 정착해 한인 후손들과 함께하며 사역해 온 결과, 이 귀한 역사 복원의 자리에 동참하게 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선교 120년의 역사를 정리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