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간체 형식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 클럽'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랬는데 최근 넷플릭스에 영화가 나와서 보니까 역시 감동이다.
흔히 소설을 읽고 영화로 보기보담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을 것을 권유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은 다음에 영화를 보고 또 다시 책을 읽어보니, 디테일한 소설을 먼저 읽기를 잘했다는 느낌이다.
건지는 채널제도 최남단의 울릉도만한 영국 섬이다. 대마도가 일본보다 한국에 더 가깝듯, 건지 또한 영국이 아닌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 코앞에 있다. 그런 위치상 2차대전시 영국점령을 노린 독일군의 교두보였다.
영국은 본토수호차 방어를 포기, 이 섬은 5년 동안 독일 점령지였다. 그런 전시상태에서 돼지, 닭, 감자 등 온갖 식료품까지 징발당하고 주민들은 문학모임 외엔 일체 회동금지였다.(새삼 우리의 왜정시대 핍박이 연상된다)
그런 판에 주민 몇 명이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식하고 귀가하다 그만 통금위반으로 적병한테 검문 당한다. 얼결에 그날 우체국장이 해왔던 감자껍질파이를 떠올려 감자껍질파이 북 클럽모임이라고 임시변통, 위기를 넘긴다. 급조된 건지의 북 클럽 탄생배경이다.
전쟁이 끝난 시점의 런던, 작가인 쥴리엣에게 건지에서 돼지 치는 농부인 도시라는 남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녀가 중고서점에 내놓았던 찰스 램의 책을 갖고 있는데, 건지의 북 클럽에서 찰스램의 책을 더 구하고 싶다는 거였다.
쥴리엣은 책을 보내면서 도시 외에 문학회회원들과도 펜팔을 하게 된다. 그리곤 작품구성의도 차 섬을 방문하는 길에, 연인이던 영국에 파견 온 부유한 미국장교와 약혼을 한다.
그녀는 건지에서 북 클럽 멤버들과 돈독한 친밀관계를 유지한다. 아울러 수줍지만 지적이고 정 많은 목공예겸 채석공인 돼지 치는 농부 도시와는 서로를 향한 믿음과 고통스런 기억까지 공유하게 된다.
그러면서 적군치하에서의 상흔들과 비밀에 근접하게 된다. 도시의 딸인 줄 알았던 네 살배기 킷은, 문학회주축멤버였던 엘리자베스와 독일군 군의관과의 사랑의 결실이었던 것.
군의관은 그 일이 탄로나 본토로 귀대하다 배가 격침돼 사망했고. 그런데다 정의감 강한 엘리자베스마저 탈출한 부상병을 숨겨 돌보다가 밀고자로 인해 킷을 도시에게 맡기고 끌려가 생사불명이라니...
졸지에 부모가 사라진 1살도 안된 킷을 문학회회원들이 돌아가며 가족처럼 키우는 거였다. 쥴리엣도 전시폭격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상처가 깊은 터. 그녀는 건지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도 가족 같은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쥴리엣은 약혼자한테 엘리자베스의 생사추적을 부탁, 의협심강한 그녀가 수용자동료를 학대하는 관리인횡포에 항거하다 총살형당한 걸 알게 된다. 인간성이 말살된 현장에서도 참다운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고 떠난 그녀를, 줄리엣과 회원들은 더욱 경외하게 된다.
그녀를 데리러온 약혼자와 같이 런던으로 귀향한 줄리엣은 건지얘기를 집필하며, 자기의 영혼이 끌리는 상대는 따로 있다고 확신, 파혼한다. 찰스 램이 '세상은 내가 건너야만 하는 대지라는 이름의 사막을 가로질러야 그리운 옛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리운 얼굴들을 당신들에게서 찾았고 가족의 정의도 배웠다며 건지로 돌아간다. 그리고 킷을 보호하고 싶은 열망과 사명감, 도시에 대한 사랑을 청혼으로 고백한다. 약혼녀란 신분 때문에 서로의 감정을 표현 못했던 둘은 드디어 사랑을 완성한다. 기분 좋은 해피엔딩에 내 마음이 절로 따스해지는 소설이자 영화였다.
[이 소설은 매리 앤 섀퍼 라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소도시에 살던 무명작가의 작품이다. 그녀는 소설 한 권 쓰는 게 평생 소망이던 평범한 사서이자 서점직원이었다. 그녀는 찰스 램의 '현실은 빈약할 지라도 꿈을 크게 가져라'는 말처럼 이 책으로 꿈을 이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출간 직전인 2008년 초, 73세로 작고했다. 책은 조카이자 작가인 애니 배로스의 마지막 교정을 거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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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