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의 시작이 불길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포성과 거리의 비명, 그리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간 사회의 권력은 왜 이토록 잔인하며, 우리는 과연 이 야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인류학자 제인 구달이 탄자니아 곰베에서 목격한 침팬지 사회는 권력의 가장 민낯을 보여준다. 인간과 유전자의 98%를 공유하는 그들의 세계에도 '독재자'는 존재했다.
공포로 무리를 군림하고, 외부 집단을 잔인하게 공격하며, 내부의 반대파를 물리적으로 짓밟는 알파 메일(수컷 우두머리). 그의 통치는 서슬 퍼런 칼날 같지만, 생물학이 증명하는 그들의 끝은 예외 없이 비참했다.
공포로 쌓은 성벽은 내부의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압제에 시달리던 평범한 개체들이 서로의 털을 골라주는 '그루밍'을 통해 유대를 쌓고, 어느 순간 집단적인 반격을 가할 때 독재자는 권좌에서 끌어내려졌다.
폭력은 일시적으로 무리를 장악할 순 있으나, 공동체의 생존력을 갉아먹기에 결국 진화의 과정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패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 또한 이 생물학적 교훈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는 '법' 대신 개인의 '의지'를 앞세웠다. 대중의 눈을 외부 전쟁으로 돌리고 군화발로 정적을 짓밟았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강력한 지도자가 질서를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 대가는 공화정의 파괴와 수백 년에 걸친 내전이었다. 1930년대 유럽의 파시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가주의라는 미명 아래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특정 집단을 사냥하기 시작했을 때, 민주주의의 가동은 멈췄고 사회적 계약은 파기되었다. 권력이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나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표적 삼아 폭력을 휘두르는 순간, 그 사회는 이미 야만의 시대로 회귀한 것이다. 헌법과 법치가 작동하지 않는 권력은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라 약탈자에 불과하다.
침팬지들이 그루밍으로 독재를 무너뜨렸듯, 인류는 '인권'과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공권력이 일탈할수록 더욱 지독하게 법을 붙들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숙지하고, 폭력의 현장을 기록하며, 소송으로 맞섰다. 기록된 폭력은 시간이 걸릴지언정 반드시 법적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압제자가 가장 노리는 것은 시민들이 공포에 질려 스스로 입을 닫는 것이다. 공포의 전염을 차단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것, 그것이 바로 야만의 시대를 끝내는 유일한 열쇠다.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민주주의'라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저절로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다.
투표를 통해 권력의 주인을 결정하고, 선출된 이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의 눈을 떼지 않으며, 부당한 권력에 연대하여 저항하는 시민의 에너지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민주주의는 관람하는 쇼나 스포츠가 아니다.
2026년의 혼돈 속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명확하다. 투표장에 나가는 발걸음, 공권력의 폭력을 감시하는 시선, 그리고 차이를 넘어 연대하는 마음이다.
법이라는 방패를 내려놓지 않고 깨어 있는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 어떤 알파 메일의 폭력도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야만은 잠시 기승을 부릴 수 있으나,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법이다.
권력은 힘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지속되는 권력은 신뢰와 제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제도를 지켜내는 마지막 책임은 언제나 시민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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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