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는 이야기] 요즘 한국은

2025-12-19 (금) 07:53:44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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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드라마의 줄거리가 생각난다. 의사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 의사가 앓고 있는 질병이 주제였다. 그 질병의 이름은 “무 통각 증” (無 痛覺 症), 글자 그대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다.

자신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불행이다. 하여 어디가 아프다는 것은 치유될 수 있다는 신호로 봐도 좋다. 아픈 감각을 지녔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프기에 의사도 만나고 병원도 가고 처방도 받고 약도 먹는다.

몸 어딘가 아픈데 감각도 없고 인지하지도 못한다면 그것처럼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나는 무사태평인데 신체 어딘가는 썩어간다거나 급박한 위기에 처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할 일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면 그 사람의 억울함을 어찌할까. 응급실로 가야할 사람이 쿨쿨 잠만 잔다면 그거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닌가.


요즘 한국을 보면 문득 통증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언론의 사설이나 칼럼이나 오피니언은 환자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를 내놓지만 정작 환자는 마이동풍이고 우이독경처럼 태연하니 하는 말이다. 마치 환자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받고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양과 흡사하다.

통증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말을 달리 하면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더위도 추위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무런 맛도 모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콜라를 마시고 커피를 마신다는 말이다. 그 드라마의 환자가 그랬다. 칼에 찔려도 무감각, 얻어터져도 느낌이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돌아가는 형국을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기적에 가까운 성장가도를 달릴 때는 환호성에 동참하기도 했다. K라는 접두어를 온갖 데에 사용하며 인기도 얻고 돈도 버는 모습에 누가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환호는 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 환호에 가려진 너무나 큰 환부가 암암리에 퍼져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시시비비를 논하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없는 무 통각 증 환자로 주저앉아 자기도 모르는 신음만 낼 뿐이다.

오래전 기사 하나를 기억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했다는 콘서트에 관한 이야기다. 1992년 어느 날, 루마니아 한 도시에서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72,000석을 완전히 채우고도 모자라 밖에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고 기사는 소개했다. 드디어 마이클 잭슨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는 무대 중앙에 가만히 서있었는데, 관객은 미친 사람들처럼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렇게 오래 서있기만 했던 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기만 했는데 장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콘서트에서 세상이 멸망한 듯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고 5천명 이상이 기절까지 했는가 하면 마침내 23명이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사람은 한 순간 우매해진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자리에 모이면 금수만도 못할 때가 허다하다. 정치의 기본은 선동이라고 말하지만 선동은 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고 거기서 우중(愚衆)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대한민국은 자칫 1992년 루마니아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해괴한 콘서트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 우중의 나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도 마이클 잭슨을 욕하지 않는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없다. 우매한 인간들이 공연히 모여 소리를 지르고 울고 죽었다. 마이클 잭슨은 엄청난 돈만 벌었을 뿐이다. 감각 없는 우중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2025년 미합중국에도 대한민국에도 그리고 열거할 수 없는 수많은 집단에서 여전히 힘써 감각 없는 짓을 되풀이 한다. 우리가 그래도 대한민국의 무감각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뿌리가 그곳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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