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1월 4번째 목요일은 추수감사절로 교회에선 감사예배를 드린다. 각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터키를 요리한 성찬을 차리고 화기애애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낸다. 우리 집도 지난 주 아이들이 전화 와서 함께 모이기로 했다. 나는 집소제하며 책장을 정리하다가 몇 년 전 읽었던 책이 눈에 띠었다. 당시 깊은 감동을 느끼며 읽었던 책, 움베르코 에코(1932-2016,이탈리아 태생)의 “장미의 이름”, 유행가 같은 가벼운 제목이지만 그 책의 의미는 내 마음에 깊게 잠겨있다.
“장미의 이름”은 단순한 흥미 있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14세기 한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을 따라가며 샤록홈즈같은 추리를 벌리면서 흥미 있게 썼다. 수도원 안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지식의 힘과 신앙의 권위가 충돌하는 중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추적한다. 젊은 수사 아드소와 그의 스승 윌리엄은 수도원을 뒤흔드는 기이한 죽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의 중심부인 도서관이 단순한 책의 저장소가 아니라, 지식의 독점과 통제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거대한 계획이 있는 장소라는 것을 발견한다.
사건의 핵심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희극에 관한 책”이 있다. 웃음을 위험한 것으로 규정한 도서관 책임자인 호르헤는 이 책이 신앙질서를 무너뜨릴 것을 두려워해서 지식을 차단하고 은폐하려한다. 그 과정에서 호르헤에 의해 살인이 저질러진다. 중세의 교회는 웃음을 금했다. 웃음은 신성모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윌리엄은 이성, 탐구, 비판적 정신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의 갈등은 곧 중세의 정신사적 균열, 곧 진리를 누가 규정한 것인가에 대한 오래된 싸움을 상징한다.
결국 호르헤에 의해 도서관은 불타고, 지식의 미궁은 폐허가 된다. 따라서 “희극에 관한 책”도 사라졌다. 윌리엄 수도사는 이성과 추리를 통해 사건을 풀어가지만, 결국 진리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진리를 독점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는 것. 그것이 이성의 빛이 꺼지지 않는 인간의 길이며, 불완전한 우리를 지키는 지혜의 향기라고 보았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장미는 이름만 남고, 아름만이 남는다. 모든 사물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이름뿐이다.
이 말은 곧, 세상은 기호와 해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진리조차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에코의 의미다. 에코는 진리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끝없는 해석의 과정으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에는 “비극 편”은 있어도 “희극 편”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 시학은 아테네문화를 구가했던 문학장르인 ‘비극’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보면 비극은 왜 서사시보다 우월한지를 설명한다. 현대 작가들도 <시학>을 창작의 바이블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시학 “비극 편”에 내려온 ‘시는 메타포다’는 문장 등은 시인들의 바이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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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