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데이빗 이그나티우스 칼럼] 워싱턴에 온 ‘미래의 사우디 국왕’

2025-11-24 (월) 12:00:00 데이빗 이그나티우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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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드럼프 대통령은 지난 화요일 백악관을 방문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미래의 사우디 국왕’으로 소개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머지않아 왕좌에 오를 것이고 수 십년동안 사우디아라비아를 다스릴 것이다. MBS라는 약칭으로 알려진 그가 추진 중인 사우디 현대화 작업의 지속적인 성공은 중동지역의 미래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미국의 국익이라는 냉정한 시각에서 보면 이것이 그의 미국 방문을 평가하는 기준선이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자말 까슈끄지의 피가 묻어있다. MBS는 지난 화요일 까슈끄지 암살사건에 대해 “고통스럽다”며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에 망명해 활동중이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정부 언론인을 무참히 살해한 것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MBS는 현재 중동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다. 그는 사우디의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을 순화시키는데 성공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 이란과의 국교 정상화를 원하는 그는 미국과의 관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를 걸기로 결정한 듯 보인다.


그의 말대로 MBS는 ‘수십년’간 이어질 도박을 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현대화가 진행중인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등 걸프연안의 이웃국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미국의 영향력에 통로를 제공할 수 있다. 점차 획대되고 있는 중국의 ‘일대일로’ 야망에 맞서는 미국 주도의 이러한 완충장치는 모두에게 더욱 안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도 혜택이 돌아가지만 지불해야 할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사우디에 F-35 전투기를 판매키로 한 트럼프의 결정은 워싱턴이 오랫동안 약속해온 이스라엘 ‘군사력의 질적 우위’를 잠식할 수 있다. MBS는 아브라함 협정에 참여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길 원하지만 그에 앞서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로 가는 ‘길’을 원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최소한 수 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미국과 걸프연안 동맹국들이 가자 지역 재건과 웨스트뱅크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개혁을 수행한다면 이스라엘은 지금보다 더 안전해질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될 수밖에 없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MBS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를 건 도박에 예측불가한 트럼프를 파트너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지난 화요일, 베드윈 복장을 착용한 MBS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과 기자들을 겨냥한 트럼프의 막말 세례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까쇼끄지 암살이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는 MBS의 두루뭉술한 발언은 피살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를 “지극히 문제가 많은” 언론인으로 묘사한 트럼프의 평가에 비해 훨씬 절제된 표현이다. 트럼프는 까쇼끄지 암살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그런 일도 있는 법”이라며 미국에 1조 달러의 투자를 약속한 무함마드 왕세자를 두둔했다.

MBS는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로 떠올릴만한 정치인이다. 부친인 살만이 국왕에 즉위한 2015년부터 야심만만한 ‘실세 왕자’였던 MBS는 부패한 왕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의 최측근 인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MBS에게는 세 가지 목표가 있었다. 빠르게 늘어나는 왕실 인사들의 빨대꼿기로 인해 속속들이 썩어버린 엽관제를 통제하고, 이슬람 극단주의를 불러온 이란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사우디 사회의 개방성을 복원하며, 사우디 왕국을 역동성이 강화된 아랍세계의 중심에 자리잡게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목표 달성에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동시에 숫한 파열음을 냈다. MBS는 2017년 사촌형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왕세자를 축출하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부정축재한 자산을 토해낼 때까지 부유한 왕실 인사들을 리야드의 리츠칼튼 호텔에 감금했고, 예멘의 후티족과 값비싼 전쟁을 벌였다.

중앙정보국(CIA)에 따르면 2018년 10월 그는 공작원들에게 자신의 권력독점을 비판해온 까슈끄지의 제거를 지시했다. 트럼프는 1차 집권 당시에도 MBS를 위해 보호막을 쳐주었다. 그러나 사우디인들의 눈에 비친 트럼프는 믿을만한 파트너가 아니다. 2019년 이란이 사우디 정유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을 때 MBS는 미국 정부가 총력을 다해 지원에 나설 것으로 믿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이같은 쓰린 경험 때문에 MBS는 미국으로부터 사우디의 안보를 확실히 보장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필자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MBS가 정치적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현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을 물갈이했고, 종교경찰을 무력화했으며,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이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재미’를 선사했다. 여성들의 운전과 스포츠 경기 참여를 허용했고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국가의 법체제 개혁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부에 대한 도전을 위험시하는 경찰국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MBS는 주변국가들에게 탈급진주의 정책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교육제도를 현대화해 극단주의를 억제한다는 목표아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웨스트뱅크와 향후 재건될 가자지구의 투명성 확대에 초점을 맞춘 인사 및 재정관리 확립에 필요한 전자정부(e-government) 개발을 추진중이며 시리아 재건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같은 개혁은 MBS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반영한다. 그는 채찍을 손에 쥔 몽상가다. UAE, 카타르의 통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풍부하고 값싼 사우디의 에너지 자원을 발판삼아 세계적인 AI 강국으로 등극한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다. 이를 위해선 자국의 에너지와 미국의 AI 기술을 접목해야 한다. 사우디 왕국의 저렴한 에너지는 MBS가 꿈꾸는 미래의 데이터센터가 유정(oil wells)만큼이나 많은 수익을 올리게 만들 수 있다.

까슈끄지는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으로 들어간 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 한 개의 챕터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MBS는 여러 개의 새로운 챕터를 쓸 수 있다.

<데이빗 이그나티우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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