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평선] 체험학습 실종

2026-05-05 (화) 12:00:00 이왕구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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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철이면 하루 10여 개교 학생 1만여 명이 몰려와 50여만 평의 묘역이 비좁다’. 1980년 5월 서울 교외 소풍 섭외장소 1순위였던 서오릉 풍경을 묘사한 신문기사다. 요맘때만 되면 서울 도심의 창경원(현 창경궁)과 경복궁 등도 소풍 온 각급 학교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 ‘학교 밖 단체생활을 통한 협동심 배양’이 소풍과 수학여행의 교육목표였지만 크고 작은 문제가 불거졌다. 교사 접대비 명목으로 각종 잡부금을 강제로 각출하거나, 소풍에 동행한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은 1970~80년대 일간지 사회면 단골소재였다. 음주, 흡연, 패싸움 등 해방감에 취한 학생들의 일탈도 골칫거리였다. 서울 시내 3개 고등학교 학생을 태운 수학여행 열차가 원주 부근에서 화물열차와 충돌해 14명이 숨진 사고(1970년), 수학여행에 나선 중학생들을 태운 버스가 열차와 충돌해 45명이 희생된 모산 철도건널목 사고(1971년), 세월호 참사(2014년, 304명 사망) 등 안전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교육당국은 소풍과 수학여행 금지조치를 내렸지만, 명맥이 끊기지는 않았다.

■ 소풍, 수학여행과 같은 체험학습이 사라지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전교조 등에 따르면 2024학년도 서울 초중고 중 수학여행을 간 학교는 42%였고, 올해 숙박형 체험학습을 보낸 학교는 53%에 불과했다. 교사들의 기피가 가장 큰 이유다. 강원 속초 현장체험학습 중 초등학생 사망사고, 전남 목포 병설유치원 4세 원아 사망사고 재판에서 인솔교사들에게 내려진 금고형이 교사들의 방어심리를 자극했다. 입찰공고, 여행자보험 가입, 정산서 작성은 물론 운전자 음주측정 같은 안전업무까지 교사에게 떠맡겨지기 일쑤니 기피 반응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국무회의에서 “구더기 생길까 두려워 장독을 없애면 안 된다”며 체험학습을 독려했지만 전교조, 교총 등 교원단체의 반응은 냉소적이다. 과도한 민원, 아동학대 고발 등 교사들의 불신이 수년간 누적된 결과일 터다. 정부-교사-학부모 간 ‘불신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면 대통령 말씀도 공염불이 될 판이다.

<이왕구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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