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선용 3-장 담그기 문화
▶ 유네스코 UNESCO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
2024년 12월 3일 열린 제19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Knowledge, beliefs and practices related to jang-making in the Republic of Korea)’의 가치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유네스코는 ‘장 담그기’ 문화가 공동체의 평화와 소속감을 조성하고 문화다양성 증진에 기여한다고 평가하면서 세대 간 전승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해 왔다는데 동의했다.
이 순간은 단순한 문화적 기록을 넘어, 한인 여성들이 지켜온 ‘살림의 철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승된 관습이 어떤 이유로 전 세계로부터 그 사회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을까?
장을 만들고 관리하며 활용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 신념을 아우르는 한국 전통 음식 문화를 매년 몸소 실천하고 계신 장선용 선생님(이하 장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유네스코에서 밝힌 네 가지 이유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한국의 장 문화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콩을 이틀을 쒀야 해. 나는 콩 불리는 걸 몰랐어. 고냥 삶어. 그럼 메주를 매달아야 되잖아. 또 띄워야 되잖아. 장담궈야 되잖아. 그럼 공용수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해, 스무지게. 그러면 독마다 소금해 가지고 간장 담잖아. 그다음에 그거 내려야지. 그다음에 또 된장 해야지. 오빠네 집에 된장, 간장 갔다 주지. 고추장 담그는 날은 학교도 못 갔어.”
둘째, 한국의 장 문화는 세시풍속, 기복신앙, 전통 과학적 요소 등을 복합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워낙에 장은 안 보여주는 거거든? 이게 62년 된 씨간장이야. 근데 이거는 인제 안 짜요. 그래서 뭐 할 때 쓰냐면 육포 할 때. 육포 할 때는 이 간장을 꼭 써야 맛이 제대로 나.”
셋째, 한국인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한국의 장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는 내가 언니네서 간장을 꼭 가져온다. 우리 언니는 꼭 (장을) 담그니까.”
넷째, 한국 음식 조리법이나 식문화에 대한 연구 등 다양한 방향으로 연구될 수 있다.
“메주 10조각 나오면 틀에 넣고 밟아. 9개는 간장, 1개는 놔뒀다가 가루 내서 메줏가루를 내. 간장 담글 때는 13579로 해야지 짝수로는 안 해. 그래서 9개 하는 거야.”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전통 과학적 요소를 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는 한국의 식문화. 미국 북캘리포니아에 계신 장선생님께는 이 ‘장 담그기’가 일상이다. 이웃동네 주민인 나는 틈만나면 그 일상을 엿보고 싶었다. 그런데 10월의 어느 가을날, 장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고추장을 함께 담글 수 있었다. 시간 맞춰 도착한 장선생님 댁 주방 탁자 위에는 레시피와 함께 미리 계량된 재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른 채 일단 팔을 걷어붙였다.
“고추장은 가을에 한 게 있고 봄에 한 게 있어요. 고추장이 햇볕을 보면 이렇게 까매져요. 속은 빨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욕 넘치게 시작한 첫 번째 나의 임무는 엿기름 가루에 물을 붓고 헝겊 자루에 걸러 엿기름 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장선생님께서는 불려놓은 찹쌀 6컵을 엿기름 물과 함께 곱게 간 뒤, 삭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비결은 불조절이었는데 찹쌀이 삭기 시작하는 정확한 시점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했다. 그 시점은 내가 보기에 마치 몽글몽글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불을 약간 높인 후 떠오르는 거품을 걷어 냈다. 그리고 거품이 멈추었을 때 소금을 넣고 한번 더 끓인 뒤 마무리했다.
졸인 찹쌀 엿기름 물을 빠르게 식히기 위해 얼음 띄운 물 위에 냄비를 얹어두고선 다음 재료들을 확인했다. 메주가루, 고춧가루, 대추가루, 꿀, 그리고 소주! 시시각각 몰아치는 변화에 집중하며 반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장선생님은 이제 어떤 재료를 넣어야 할 차례인지, 그리고 얼마만큼 넣어야 하는지를 매의 눈으로 체크하셨다. 나의 눈과 손은 레시피와 재료들을 넘나들며 바쁘게 움직였다.
남은 과정은 식은 찹쌀 엿기름 물에 메주가루를 굵은 체에 내려 잘 섞은 뒤 고춧가루를 나눠 넣고 잘 섞는 것이었다. 레시피대로 준비된 고춧가루 양을 다 넣으니 적당한 찰기가 생겼다. 그다음 대추가루와 꿀을 넣어 단맛을 추가하고,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주를 휘리릭 한 바퀴 돌려 뿌렸다. 한 번 두 번 고추장을 저어 섞을 때는 몰랐는데 모든 재료를 다 섞고 나서 보니 두 팔이 쑤셨다. 힘이 빠질 때쯤, ‘잘하네’하고 추임새처럼 들려오는 장선생님 칭찬에 다시 힘이 솟곤 하여 다행이었다.
“고추장은 썰물(Low tide) 때 담아야 해. 그래야 항아리가 안 넘쳐”
핸드폰을 열어 당일 썰물 때를 확인하니 마침 고추장을 다 섞어낸 시간과 일치했다. 놀라움에 환호성을 지르며 잘 담근 고추장을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다 옮겨 담았을 때쯤 두 번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장선생님 레시피로 만든 고추장이 모자람도 넘쳐남도 없이 항아리 크기에 딱 맞게 채워졌기 때문이다.
“내 레시피대로 하면 절대 안 틀려. 아주 딱 맞아.”
만발의 준비를 마친 항아리를 빛 좋은 테라스에 내어 놓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을 볼때마다 장 만들기가 세대 간 전승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장선생님 댁에서 집으로 가져온 작은 고추장 항아리는 해가 지면 뚜껑을 닫아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데 오전에 열어둔 뚜껑을 닫는 저녁 때마다 나날이 쫀쫀해지는 고추장을 마주한다. 고추장으로 무엇을 해먹을지, 어떤 음식을 하면 식구들이 좋아할지 생각해 보는 것이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요즘, 장선생님께서 지켜온 ‘살림의 철학’이 우리 집 한켠으로 스며들어온 것만 같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문화가 우리집 마당에서 살아 숨쉬니 저절로 배가 부른 요즘이다.
=====
[장선용 선생님의 고추장 레시피]
고추장
준비물: 찹쌀 6컵, 가루 엿기름 3컵, 고운 고춧가루 7.5컵, 고추장 메주가루 7.5컵, 식탁용 가는 소금 1컵, 대추가루 1/2컵, 꿀 1/2컵, 물 18~21컵, (소주 약간)
1. 찹쌀 6컵을 물에 8~10시간 정도 불린다.
2. 가루 엿기름 3컵에 물 18~20컵 정도를 넣고 헝겊 자루에 걸러서 쓴다.
3. 1과 2를 블렌더에 넣어 곱게 간다.
4. 갈아 놓은 찹쌀물을 아주 약한 불 위에서 삭힌다.
5. 불 위에 끓일 때 찹쌀이 눋기 쉬우니 처음에는 약한 불 위에서 서서히 젓는다.
6. 반죽이 삭기 시작하면 눋지 않기 때문에 불을 약간 높여 가끔 저어준다.
7. 끓으면 거품을 걷어 내면서 졸인다.
8. 거품이 더이상 안 생기면 소금을 넣고 한번 더 끓여 완전히 식힌다.
9. 완전히 식은 엿기름 물에 곱게 빻은 메주가루를 굵은 체로 쳐서 넣고 덩어리가 없이 잘 섞는다.
10. 9에 고운 고춧가루를 넣고 다시 한번 잘 섞는다.
11. 10에 대추가루와 꿀을 넣고 다시 한번 잘 섞는다.
12. 소주가 있다면 11에 약간 넣어 잘 섞는다. (상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13.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고추장 위가 마르도록 햇볕에 말린다.
참고: 가을고추장은 약간 되도 괜찮고, 봄고추장은 질은것이 더 낫다. 캘리포니아 햇볕이 너무 강해서 고추장이 마르기 때문. 무를 토막낸 뒤 햇볕에 꾸득꾸득 말려 항아리 밑에 놓고 그 위에 고추장을 넣으면 고추장이 너무 마르지 않고 무는 맛있는 장아찌가 된다.
<사진 양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