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대학과의 전쟁이 고착화 단계로 접어들면서 학계가 관점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제공했다. 수십 년간 이어져온 논쟁은 더 많은 관점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보수진영과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학문적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제 이 논쟁은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학계의 존재론적 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인물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이다. 그는 1974년 칼텍 졸업식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학의) 첫 번째 원칙은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기대하는 것만을 보는데 능숙하다. 특히 어떤 믿음에 감정적으로 몰입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선 꾸준한 자기성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때로는 우리와 다른 관점을 가진 외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필자는 관점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글을 자주 썼지만 최근 미국대학교수협의회의 학술지 ‘아카데미’에 실린 리사 시라가니안의 “관점의 다양성에 반대하는 일곱가지 명제”와 같은 반론을 다루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할애했다. 시라가니안은 학계에 이념적 편향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관점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논거들 역시 빈약하고 불성실할뿐더러 진리탐구와 학문적 자율성에 해를 끼친다고 평가절하한다. ‘고등교육 연대기’에 실린 그녀의 동반 에세이에는 “관점의 다양성은 마가(MAGA)의 음모”라는 꽤나 도발적인 제목이 달렸다. 필자는 그녀의 일곱가지 명제에 대해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이미 훌륭한 반박문이 여러 편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신 필자는 에세이의 도발적인 제목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단지 그것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도 관점의 다양성을 지지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제목이 시라가니안의 주장을 정치적 전략으로 정확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 성향의 학자들에게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라는 외침이자 선동에 사용될 일련의 논점이다.
에세이의 제목은 결집 구호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선동용으로는 낙제점이다. 상아탑 안의 교수회에나 통할 주장이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훨씬 더 거친 외부의 전장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니 설령 시라가니안의 주장이 추상적으로는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전략적으로는 재앙에 가깝다.
더 넓은 세상에서는 학계가 정말 좌편향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 자체가 어리석어 보일 수 있고 - 조금 너그럽게 말하자면 -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거품 속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시라가니안의 표현대로 “부차적이고 외부적인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 역시 말이 안된다. 진리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타인이 제공한다면 어느 시점에서건 물주인 타인의 목적을 일정부분 수용할 수 밖에 없다.
학자들은 진리 추구가 금전적 거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저급하고 속물적인 생각에 본능적으로 반감을 보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저급하고 속물적인 곳이다. 우리는 진리 그 자체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덜 고상한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사용할 금전과 맞바꾸기 위해 진리를 탐구한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대가를 원한다. 그들은 단지 어딘가에서 ‘진리의 총량’이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특히 그 진리 중 하나가 자신들을 우둔한 편견쟁이로 묘사한다면 더욱 그렇다.
학자들이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20세기가 그들에게 매우 유리한 거래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산업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과학 연구와 지식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연방 정부의 자금이 연구실과 등록금 보조로 흘러들었다. 동시에, 중산층 직업으로 가는 값진 입장권을 얻기 위해 가정들은 자녀의 대학교육에 점점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내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거위가 황금알을 낳지 않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유리한 체제 덕분에 대학들은 실용적 효용성이 뚜렷하지 않은 연구에도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학문 공동체는 좌파 문화를 발전시켰고 결국 자신들에게 재정을 제공하는 사회에 점점 더 적대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됐다. 한때 서구 문명의 귀중한 유산을 수호하던 대학들은 이제 그 유산의 끝없는 억압을 기록하고 비판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물론 대학이 사회 비판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학의 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년 혹은 50년 전보다 확실히 커졌다. 학계 내의 강력한 세력들이 그 비중을 더욱 키우려 노력했다. 이러한 확대재생산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계속해서 알을 낳을 때만 지속 가능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거위는 영 시원치 않은 알을 낳고 있다.
대학 학위의 가치는 정체되어 있고 인공지능이 많은 지식 노동을 대체함에 따라 앞으로 더 떨어질 수도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를 이끌어야 했던 전문가들은 이성을 잃고 어떤 선택이 더 가치 있는지를 둘러싼 개인적 의견을 바이러스에 대한 과학적 판단과 혼동했다. 대학 행정가들은 거의 모든 정치적 논쟁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기부자들과 입법자들을 분노하게 만든 소란스러운 시위 문화를 방치했다. 지난 10년간 대학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급격히 하락했으며, 이는 보수층뿐 아니라 중도층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런 이유로 공화당은 이제 대학을 공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보수 성향 인사들이 더 많이 학계에 참여하는 것이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는지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고등 교육의 평판을 훼손한 자충수를 어느 정도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학문의 고상한 이상에 비하면 다소 속물적인 고려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고상한 이상을 추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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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건 매카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