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이민 정서, 유럽의 난민 배척, 그리고 일본의 혐한 시위-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바로 ‘혐오의 정치학’이다. 극우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판은 더 이상 정책의 경쟁이 아니라, 감정을 조율하는 무대가 되었다. 그 감정의 중심에는 불안과 분노, 그리고 증오가 있다.
정치학자 카스 머더는 유럽의 포퓰리즘 급진우파 정당들을 다룬 저서에서 “급진우파의 본질은 포퓰리즘이 아니라 배제의 논리”라고 했다. 그들은 ‘순수한 국민’과 ‘부패한 엘리트’,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데 능하다. 불평등이나 사회 불안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기보다, 이민자나 외부 세력 탓으로 돌린다. “일자리를 빼앗는 건 로봇이지만, 증오의 화살은 난민을 향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일부 시위 현장에서는 ‘혐중’ 구호가 일상적으로 등장한다. 중국의 정치·경제적 압박, 미세먼지 논란, K-콘텐츠 표절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혐중 정서’가 정치적 동원 수단으로 변해가고 있다. 과거 일본의 ‘혐한 시위’가 그랬듯, 한국인의 불만과 불안을 결집시키는 도구로 쓰이는 것이다.
극우는 언제나 ‘잃어버린 위대함’을 되찾자는 약속을 내건다. 트럼프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는 그 상징이다. 이 구호는 단순한 선거 문구가 아니라, 극우 국제 네트워크의 교본이 되었다. 프랑스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원내 대표, 독일의 극우정당 AfD,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그리고 일본과 한국의 극우 시민단체들까지-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 ‘국가 우선주의’, ‘엘리트 불신’, ‘문화전쟁’, ‘반이민’이 그것이다.
언어학자 루스 보다크는 저서 ‘공포의 정치학’에서 “공포를 조장하는 언어는 정치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다. 오늘날 그 무기는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힘을 얻었다. 분노는 클릭을 부르고, 혐오는 조회수를 만든다. 진실보다 거짓이 빠르고, 합리보다 감정이 지배한다. 정치가 유튜브 댓글창에서 형성되고, 민주주의는 분노의 장터로 변한다.
영국의 정치학자 로저 이트웰과 매슈 굿윈은 “극우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에서 자라난다”고 분석했다. 제도권 정치가 불평등과 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때, 대중은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는 선동가에게 마음을 준다. “이민자만 막으면 나라가 나아질 것”이라는 트럼프식의 구호 말이다.
이같은 혐오의 정치는 결국 사회를 분열시킨다. ‘우리 vs 그들’의 구도는 합리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언론을 적으로 만든다. 극우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지만, 들어온 뒤에는 제도를 잠식한다. 언론을 통제하고, 사법부를 흔들며, 시민의 불신을 키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총성 없이도 무너진다.
정치가 감정에 지배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혐오는 불안 속에서 자라고, 그 불안은 진실보다 빠르게 번진다. 혐오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 연대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알고리즘의 투명성, 인권 중심의 국제적 협력-이것이 ‘혐오의 정치학’을 넘어설 길이다.
지난 주말 트럼프 행정부의 민주주의 위협, 법원판결 무시, 반이민 정책, 연방정부 구조조정, 대학탄압 등을 비판하는 ‘노킹스’(왕은 없다) 시위가 뉴욕과 LA를 비롯한 미 전역 2,700여곳에서 700여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정치는 증오를 먹고 자랄 때 썩는다. 혐오의 시대를 끝내는 데 필요한 것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과 용기가 결집된 ‘연대의 정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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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세희 부국장대우·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