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의 <음악산책>
2025-09-18 (목) 08:16:25
이정훈 기자
요즘 한국사회에서 말러가 지고 쇼스타코비치가 뜬다는 유행어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말러에 열광하던 교향악 팬들이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음악에 눈을 뜨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쏘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한국사회에서 사상적 장애를 딛고 얼마만큼 붐을 일으킬지는 아직 두고 볼 일이다.
요즘이야 교양 음악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즐겨 듣는 음악이지만 80년 대 까지만 해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한국에서 금지곡이었다. 이름하여 공산당 음악. 쏘련이 무너지고 해금됐지만 사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한국을 제외하고는 서방세계에서는 일찍부터 연주되었던 최고의 인기 곡 중의 하나였다. 오히려 쏘련 본토보다도 자유진영에서 더 열렬히 환영받았던 음악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었다. 냉전시대의 사상적 대립 속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서구(자유)진영에서 환영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말 그대로 진짜 공산당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철의 장막, 폐쇄적인 사회에서 작곡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쏘련 정부의 억압 속에서 피어난 자유에 대한 열망… 예술혼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사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이런 모든 것 위에 말 그대로 빨갛게 물든 피의 혁명… 공산주의의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 있는 음악이었다. 물론 그것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정치적이거나 권력의 향배와는 무관하게 그저 사회주의 성향의 음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한 시대의 체제 변화에 있어서 엄청난 회오리 바람과 피의 숙청 그리고 동시대의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원죄가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괴테가 말한 눈물의 빵…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 더욱 실감난다. 어떻게 하나의 음악이 저 처럼 절망스럽게 들려올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나의 음악이 저 처럼 처절하게 메마르고 어둡고 또 동시에 처절한 희망으로 움터오를 수 있을까… 사실 수많은 클래식 음악이 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혁명 음악을 들어보기 전에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정말 처절하게도, 단순히 머리로 써진 음악이 아닌 산처럼 쌓인 시체와 그 무덤 뒤에서 써진 피묻은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레이디 멕베드’라는 오페라 작곡으로 한 때 죽을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스탈린은 ‘레이디 멕베드’가 반동적인 요소가 가득하다는 이유로 쇼스타코비치를 숙청할 명분을 찾게되는데 이 때 죽음을 예감한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의 정당한 비평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교향곡 5번을 작곡한다. 당시(1937년) 레닌그라드에서 이 곡이 발표됐을 때 열광한 청중들의 박수가 교향곡 연주시간 보다 길었던 무려 40분 이상 이어졌다고 한다. 청중들의 광분(?)으로 연주회장은 전기불을 모두 소등한 뒤에나 조용해졌다고 하며 이로인해 쇼스타코비치는 숙청 위기에서 벗어나 기사회생하게 된다.
쇼스타코비치는 (뛰어난) 교향곡 작곡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저주를 뚫고 15개의 교향곡을 남긴 불사조 중의 한명이었다. 서슬퍼런 스탈린의 압제 속에서도 살아남은 전사이기도 했는데 공산당 작곡가로서 체제에 저항하기 보다는 스탈린에 아부하면서 비굴하게 살아남았다는 오명도 여전히 존재 한다. 아무튼 이 이상한 작곡가는 쏘련 체제를 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계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교향곡 5번같은 통쾌한 음악으로 스탈린의 싸대기를 갈겼다는 찬양론자들의 칭송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야말로 빨간 피터의 원숭이처럼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사람처럼 재주를 부리자 더욱 대우받게 됐다는 (공산당을 위한)진짜 광대 예술의 극치였는지, 정말로 피의 혁명과 그 희생자들을 위한 전사의 음악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야말로 그것이 공산주의의 그물이었든 민주주의의 그물이었든 그 어느 그물에도 걸리지 않았던 변명(?)의 달인, 한 시대의 위기를 오직 음악으로 극복했던, 두 얼굴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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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