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감나무의 추억

2025-05-22 (목) 04:05:48 이중길 포토맥 문학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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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에 한 그루 감나무를 심었다. 며칠 후, 감나무의 끝가지에 꽃술 하나가 외롭게 남아 있었고, 나머지 가지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밤에 사슴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아침에 뒷마당에서 불만을 토로하던 나를 바라보던 이웃이 어떤 꽃나무를 심었냐고 물었다. 내가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나무라 말하자, 그는 몹시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감나무를 심은 나의 깊은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태어난 집은 시골의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우리집 뒷마당엔 집 주위로 둘러있는 토담벽 사이에 다섯 감나무가 있었다. 봄이 오면 마당, 그리고 담장 너머 이웃의 뒷마당에 감꽃이 떨어지고, 이웃의 살구나무도 꽃잎을 떨어뜨려 우리 집 마당을 붉게 물들이곤 하였다. 먹거리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 봄에는 동네 아이들이 감꽃을 주우러 몰려들었고, 그들과 함께 감꽃을 주워 먹거나 그것으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놀던 기억이 새롭다.

어렸을 적 나는 비교적 활발한 성격을 가진 학생이었다. 옆집엔 나와 같은 중학 3학년 여학생이 살고 있었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고 지내는 사이였다. 가을에는 감나무에 많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담장 너머 그녀 집으로 뻗어나간 나뭇가지에도 많은 감이 열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어 마당에 떨어진 감을 주워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가, 빨간 홍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 먹곤 하였다. 겨울에는 할아버지가 곶감을 만들어 놓은 곳간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가을 어느 날 오후, 푸른 스커트를 휘날리며 뒷마당에서 뛰놀고 있던 옆집의 그녀는 하늘에서 지저귀는 파랑새처럼 보였다. 잠시 후 담장에 가까이 다가와 떨어져있는 감을 줍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빨간 홍시처럼 예뻐 보였고 특히 핀으로 깔끔하게 묶은 단발머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느 날 점심 후 마루에 앉아 그녀 집으로 뻗어 넘어간 나뭇가지에 매달린 감을 쳐다보며 그녀가 나왔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녀를 볼 때마다 하얀 얼굴이 감빛에 물들어 내 가슴 속에 숨어 들곤 했다. 눈을 그녀의 집에 고정하고 있을 때, 그녀 친구가 찾아오니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두 사람은 뒷마당의 평상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의 어머니가 무언가 간식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담장을 향해 다가가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집 구석에 보관해 둔 감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그 바구니를 그녀에게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바구니에 담긴 홍시를 그녀의 어머니께 건넸고, 그 순간 그녀가 다가와 “고맙다” 는 말과 함께 방긋 웃었다. 그녀의 하얀 잇몸은 내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미소를 띤 그녀의 얼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살구꽃이 만발할 때,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이사한다며 우리 집에 작별 인사하러 왔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문틈으로 떠나가는 그녀를 쓸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사한 후 6개월이 지나갔다. 그녀가 떠난 곳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따뜻하게 밀려오는 그녀의 미소가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듯하여 돌담 너머로 뻗어있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곤 했다. 어느 날 뜻밖에 배달된 엽서 한 장에는 “가끔은 내 얼굴이 감꽃 속에 담겨 있어 시골의 옛 집을 잊을 수 없노라” 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이 ‘네 얼굴’의 오타이기를 바랬다. 편지를 통해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바로 편지를 보내는 용기를 냈다. 답장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내가 감을 바라볼 때와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을까? 한 해가 지나고 다시 감꽃은 피었지만 그녀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모든 꽃도 결국에는 시들고 만다. 꽃이 진 자리에 그 희생으로 열매가 맺힌다. 나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쓸쓸한 추억의 열매를 얻었다. 정서적으로 감나무를 통해서 쌓은 쓸쓸한 인연,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한국에서 또는 미국에서 그녀를 완전히 잊고 살아 왔다.

나의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고 떠나갔던 이웃집 그녀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사춘기 시절의 이성에 대한 감정은 영혼의 가장 순수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신성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지가 잘려 나간 감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아름다운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사슴에게 간절히 빌고 싶다. 제발, 저 감나무를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이중길 포토맥 문학회,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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