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단돈 25불의 가치는 놀라웠다

2025-04-10 (목) 02:55:58 제프 안 (미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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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 안의 오세아니아 여행기 <9>

▶ 뉴질랜드 골프 1-the epic journey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단돈 25불의 가치는 놀라웠다
세상 모든 골퍼들이 가진 두 가지 유혹: 1 생애 최고의 라운드 2 새롭고 멋진 골프장에서의 라운드.

호주 시드니에 도착하기 전 은근히 골프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호주는 그렉 노먼, 애덤 스콧, 캐리 웹 등 기라성 같은 골퍼를 배출한 나라다. 넓은 땅만큼 로열 멜버른 같은 세계적 명성의 코스들도 즐비하다.  하지만 하필 우기로 인해 골프는 포기했다. 대신 도시 관광과 멋진 저녁 식사를 즐기고 골프 대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신데렐라’ 오페라 관람으로 대체했으나, 아쉬움은 남았다. 그런데 골프의 기회는 뜻밖에도 뉴질랜드에서 찾아왔다.



크루즈를 타고 뉴질랜드 남섬 오반(Oban, 인구 500) 작은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별반 관광거리가 부족한 소도시.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골프 코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시청과 프로샵을 겸하는 곳을 찾아가 보니 그린피, 렌탈 클럽, 공 5개 포함 1인 $25이었다. 공을 반환하면 개당 1불씩 환불도 해준단다. 하지만 신용카드는 물론 미국 달러도 받지 않고 뉴질랜드 현금만 가능했다. 난감해하니, 직원이 길 건너편 호텔에서 알아보라고 했다.

호텔 카운터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졸고 계셨다. 고풍스러운 계산기에서 현금을 환전해주셨는데, 환율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할 엄두도 못 냈다. 할머니 얼굴은 바닷바람에 깊은 주름살이 가득했고, 표정이 고집불통 그 자체다. 프로샵으로 돌아가 진짜 나무로 만든 우드, 상처투성이인 윌슨 아이언 등으로 구색을 맞추어 낡은 골프백에 담았다. 첫 번째 홀이 어느 방향이냐고 물으니, 담당자가 “택시 타고 갈 거냐”고 되묻는다. 헐!  빨리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며 돛단배 즐비한 해안을 끼고 걷다가 비포장 오른쪽 언덕길로 가란다.

<특이해야 재미있는 골프코스>

간결한 설명과 달리 우여곡절 끝에 험난한 비포장 언덕길을 지나 멀리 코스가 보였다. 유격훈련이 따로 없었다. 이미 먼지와 땀에 기진맥진한 나와 달리 와이프는 묵묵히 앞길을 재촉한다. 겨우 힘들게 골프 코스를 찾았지만 1번 홀이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단 펜스를 넘어 걸어가니 4번 홀 티 박스가 나왔다. 4번 홀부터 시작하자고 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와이프가 원칙을 내세우며 1번 홀로 가자고 우긴다. 1번 홀을 찾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골프 코스, 4번 홀에서 시작할 것인가? 1번 홀까지 찾아가 친다고 한들 결국은 이곳 시작점까지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간신히 설득하고, 4번 홀에서 티샷을 했다. 하지만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해변 모래밭으로 날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경기-같이 살기 힘든 사람>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경기 골프, 원칙을 중시하기 때문이지만 원칙주의자와 사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해변에서 공을 찾아 모래 위에서 멋지게 탈출하면서 한순간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낯선 코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국적 해안선, 옆으로 누운 자태의 오달리스크 적 여인이며 그 속에 밤송이처럼 관능미 넘치는 섬들, 아름다웠다. 절벽 끝에 자리 잡은 좁은 그린, 페어웨이 밖을 벗어나면 정글과 바다. 페블비치, 토리 파인에 버금가는 풍광! 그러나 그린은 우리 집 화장실보다 작고, 퍼팅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게 즐거웠다.

3개의 공을 잃어 혹시나 해서 숲속을 뒤져도 잃어버린 공하나 없었다. 각자 남은 공 하나, 애지중지 치는데 마지막 홀에서 내 어프로치 샷이 숲으로  들어가 둘이 공 하나로 퍼팅했다. 그러나 해변에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자갈도 만날 수 있었고 몇 개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링가 링가’ 알고보니 마오리어 로 ‘손, 손’이라는 뜻이다. 손가락처럼 코스가 바닷가를 끼고 도는 멋진 풍광이다.  


<실낙원에서의 골프>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아무도 없는 골프 코스. 워싱턴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건이다. 낙원에서 단둘이 노니는 아담과 이브처럼, 우리는 깔깔거리며 걷다 방치된 프로샵을 마주했다. 오랜 기간 문을 걸어 잠근 프로샵 안으로 누군가 사용한 스코어 카드가 바닥에 버려져있다. 작은 마을에서 골프코스를 정상 유지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둘만 치기에 아깝다는 생각과, 영특하지만 교육받지 못한 소녀 같기도 하여 마음이 아팠다. 방문객 드문 이곳이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 주었다. 골프백을 메고 해안선을 따라 다시 돌아오는 길에 같은 크루즈 선을 탄 이들이 렌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정말 골프 쳤어?”라며 놀라워했다. 그들의 경탄과 찬사를 들으며 돌아오는 길은 마치 전선에서 귀환하는 용사들 마냥 뿌듯했다.

<골프 레슨 101>
골프백과 하나 남은 공을 돌려주니 $1을 환불해 준다. 골프코스에서 공을 주워온 동네아이들에게 개당 $1씩 준단다. 아~하 숲속에도 공이 없는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햇볕이 작열하는 호텔 패티오에서 흑맥주를 꿀꺽 들이켰는데, 흘러내린 거품을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날려 보냈다. 해소된 갈증, 상쾌했다. 스피커에서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가 흘러 퍼진다. 그 누가 이런 외지에 골프코스를 만들었을까? 

6시간 남짓 머물었던 이 작은 항구 도시 오반, 4시간 골프 즐기고 들이킨 흑맥주. 골프화도 장갑도 없이 상처투성이 싸구려 공으로 친 오늘의 골프, 무엇하나 완벽하지 않으면 불만이 많은 나에게 메시지를 전하며 오래전 골프에 입문할 당시의 초심을 일깨워 준다. 때로는 유서 깊고 유명하며 완벽한 조건을 갖춘 코스보다, 이렇듯 우연히 찾아낸 코스에서 새롭고 멋진 경험을 즐길 수도 있다는 점이 골프의 매력 아닐까. 우연히 마주한 단돈 $25의 가치는 놀라웠다. 뉴질랜드 남부 최첨단 해안가의 링가 링가 골프 코스는 나에게 최고의 추억이자 이야기 거리다.
문의: Jahn20@yahoo.com

<제프 안 (미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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