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희망의 씨

2025-03-07 (금) 12:00:00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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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늦여름 열대 폭우 헬렌이 플로리다를 덮쳤다. 시속 225㎞의 강한 바람으로 나무가 뽑히고 전봇대가 부러졌으며 창문이 깨어졌다. 밤사이 헬렌은 동북부 지역을 거슬러 올라가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도 덥쳤다. 도로가 끊어지고 흙과 바위가 지붕들을 덮쳤다. 주민들은 이런 홍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노스캐롤라이나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1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전기도 없이 버텨야 했다.

연말이 다가올 때까지도 폭우가 남기고 간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성탄절을 두 주 앞둔 어느 날 칠십대 쯤 돼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빨간 옷을 입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방문했다. 조용한 집 문을 두드리자 50대쯤 되어 보이는 백인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매우 힘들지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하러 왔어요...”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100불짜리 지폐 석 장을 꺼내어 손에 쥐어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아주머니는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이렇게 찾아와서 돈까지 쥐여 주다니요...” 그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집을 나왔다. 할아버지는 옆에 있는 옷 가게로 들어갔다. 홍수 흔적이 아직 채 가시지 가게에는 옷가지들이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요즘 많이 힘들지요? 아주머니 따끈한 커피라도 한잔하세요” 할아버지는 가게의 아주머니 손에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백달러 지폐 한 장을 쥐여주었다. 의외의 방문을 받은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고마워요. 찾아오셔서 돈을 주시다니요...” 할아버지는 그 가게 옆집으로 갔다. 거실을 쓸고 있던 삼십대 쯤 되어 보이는 주부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크리스마스 작은 선물을 전하러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백달러 지폐 두 장을 꺼내어 아주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인자한 아버지 모습이었다. 지친 듯한 주부의 눈이 붉어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힘내세요. 재산은 잃었지만 희망은 간직하세요.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랍니다” 문밖으로 나가는 할아버지는 희망이라는 씨를 뿌리는 농부 같았다.

1978년 인천 부평에서 겪었던 홍수 사태가 떠 올랐다. 한강이 범람하면서 집안으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엌과 방으로 밀려오는 물을 피하여 아이들을 등에 업고 황급히 집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지대가 높은 쪽으로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맞은편 2층에 살던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세요. 여기는 괜찮아요”. 쫓기는 걸음으로 이층집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많이 놀랐겠어요. 추울 텐데 어서 방으로 들어와요...” 가족을 맞아 준 분은 아는 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반겨 주었다. 물이 빠진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 옷가지, 아이들 책을 햇볕에 말리느라 가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소유했던 모든 것을 홍수는 앗아갔다. 그러나 따뜻한 이웃의 정이 그 빈 곳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것은 희망의 씨였다.

<전병두 서북미수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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