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말 뭐 볼까 OTT] 기억 잃는 남자, 아픈 기억 지닌 여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2025-02-2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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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의 최근작 ‘메모리’

▶ 파라마운트+ 채스테인·사스가드 주연 영화

실비아(제시카 채스테인)는 어느 날 고교 동창회에 간다. 한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실비아는 겁에 질려 행사장을 급하게 빠져나온다. 남자는 집 앞까지 쫓아오고 밤새도록 주변을 서성거린다. 실비아의 옛 연인일까, 습관성 스토커일까.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던 실비아는 날이 밝자 남자에게 말은 건다. 남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사는 곳이 어디인지, 실비아를 왜 따라왔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실비아와 사울(피터 사스가드)은 그렇게 기괴한 첫 만남을 갖는다.

사울은 초기 치매 환자다. 아내는 죽었고, 동생의 보호 속에 함께 산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로 실비아를 따라갔다. 실비아가 죽은 아내를 닮아서였는지, 한눈에 반한 것인지, 아니면 지인이라고 착각했는지, 또는 무의식적이었는지 알 수 없다. 실비아는 그런 사울에게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한다. 혹시 고교 시절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일행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실비아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가족에게도 암시만 할 뿐 쉬 꺼내 놓지 못하는 과거다. 그는 옛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으나 후유증이 오히려 그의 삶을 옥죈다. 집 문을 이중삼중으로 매번 걸어 잠그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속 지옥을 가늠할 수 있다.


실비아와 사울은 서로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둘의 감정 교류는 역설적이다. 실비아는 과거를 잊고 싶은 반면 사울은 옛 시간을 떠올리고 싶다. 실비아는 사울과 함께 하며 행복한 기억을 새록새록 쌓아가며 옛일을 조금씩 지울 수 있는데, 정작 사울은 먼 시간의 일을 더 잘 기억한다.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사랑은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과거도 미래도 실비아와 사울에게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지금 이곳에서 서로 바라보며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하다. 영화는 사랑도 인생도 예측 불가능이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현재를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멕시코 감독 미셸 프랑코의 최근작이다. 프랑코 감독은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은 ‘애프터 루시아’(2012),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크로닉’(2015),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뉴 오더’(2020)로 젊은 거장 칭호를 듣는 이다. 인간관계와 심리, 행동을 세밀히 묘사하며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는 데 빼어난 재능을 지닌 감독이다. 그의 연출력은 ‘메모리’에서도 여전하다. 프랑코 감독은 ‘메모리’에 대해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연기 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타미 페이의 눈’(2021)으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채스테인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라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새 삶을 도모하는 실비아는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구체성을 얻는다. 사스가드는 체념과 관조 사이 놓인 듯한 이의 모습을 구현하며 채스테인의 연기에 화답한다. 사스가드는 이 영화로 2023년 베니스영화제 남자배우상을 받았다.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주말 뭐 볼까 OTT] 기억 잃는 남자, 아픈 기억 지닌 여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헬렌은 영국 국방부 장관인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듯하나 속마음은 다르다. [넷플릭스 제공]

■블랙 도브 Black Doves (넷플릭스)

영국 국방부 장관과 결혼한 스파이 헬렌(키라 나이틀리)이 화면 중심을 차지한다. 헬렌은 남편 몰래 사귀던 연인 제이슨(앤드루 고지)이 살해되며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자들의 소행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 헬렌은 첩보 활동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는 상사의 경고를 듣고 살인 사건 조사에 나선다. 살인 사건에는 마약 조직이 연계돼 있고, 국제 분쟁이 끼어들기도 한다. 헬렌이 동료 샘(벤 위쇼)과 함께 총과 머리를 쓰며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스릴 넘치게 그려진다. 6부작. 19세 이상.

[주말 뭐 볼까 OTT] 기억 잃는 남자, 아픈 기억 지닌 여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노아와 조앤은 종교도 가치관도 다르다. 하지만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리는 힘을 어찌할지 모른다. [넷플릭스 제공]

■우린 반대야 Nobody Wants This (넷플릭스)


남자는 랍비이고 여자는 ‘19금’ 팟캐스트 운영자다. 종교도 성격도 멀고도 먼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한다. 남자 노아(애덤 브로디)의 가족은 방해 공작을 펴고, 여자 조앤(크리스틴 벨)의 주변인들 역시 도움보다 훼방을 놓기 일쑤다. 난관이 많을수록 뜨거워지는 게 사랑일까. 드라마는 ‘로미오와 줄리엣’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가까워지기 힘든 노아와 조앤의 여러 사연을 통해 웃음과 달콤함을 빚어낸다. 다민족 다문화 국가인 미국의 모습을 엿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국경은 있으나 사랑에는 어떤 국경도 없음을 새삼 역설하는 드라마다. 10부작. 19세 이상.

[주말 뭐 볼까 OTT] 기억 잃는 남자, 아픈 기억 지닌 여자…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공한 저널리스트인 캐서린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나 20년 전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일로 일상이 악몽으로 돌변한다. [애플TV플러스 제공]

■디스클레이머 Disclaimer (애플TV플러스)

유명 저널리스트 캐서린(케이트 블랜쳇)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정체불명 소설을 발견한다. 캐서린이 20년 전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캐서린은 음탕하고 무책임하고 사악하다. 복수심에 불타는 한 노인이 발간한 소설 때문에 캐서린과 가족은 위기를 맞는다. 캐서린은 20년 전 이탈리아에서 어떤 행동을 한 걸까. 그는 정의로운 척하는 이기적인 인물에 불과한 걸까. 드라마는 의심을 조금씩 축적해가며 후반부 폭탄 같은 반전을 만들어낸다. 팜파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눈길을 잡는다. ‘로마’(2018)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연출했다. 7부작. 19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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