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AI는 사람의 운명을 알까?

2025-02-19 (수) 08:01:03 백 광 알렉산드리아,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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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철이 든다고 했던가. 액운의 숫자 아홉 해를 맞이하는 90세, 을사년 2025년 새해에 모두들 힘들다고 하는 주변 정리를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첩첩이 쌓인 옷장 미닫이를 열었다.

50여 년 간 한 번도 버리지를 못하고 수년째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들을 6개의 40파운드 쓰레기봉투에 차곡차곡 싸서 가까운 Salvage Army에 버리고 와서 소파에 앉아 옷과 함께 떠나보낸 50년의 추억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1969년, 월남전 패망의 조종이 울렸던 다낭에서다. 차이나 비치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가슴에 안고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US Naval Support Activity(미 병참 군수기지 사령부)는 주월미군 군사력의 본산이었다. 그런데 지하벙커에 저장된 수만 톤의 화약고 포탄이 연쇄 폭발하면서 5톤 무게의 파편이 막사 지붕을 뚫고 책상 위에 내려 꽂혔다. 순간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진 트라우마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이따금 나를 괴롭힌다.


다음 날, 다낭 시내를 흐르는 메콩 강변의 벤치에 앉아 버드 와이즈 맥주를 들었다. 간밤의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물은 시치미를 뚝 떼고 유유히 흐른다. 번번이 당하는 베트남의 슬픈 역사와 약소민족의 애환을 함께 나누었다.

옆구리에 뾰족한 총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다른 내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속삭인다. “돌아가자.” “일등은 못 되어도 꼴지는 면했지 않았나. 흔적은 남기기는 쉬워도 지우기는 어렵다. 지우기 힘들면 그냥 부적처럼 가슴에 안고 살아가자.”

훗날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은 월남 파병에 따른 KCIA(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결이 다른 2중 나사의 씨앗이 뿌려진 결과이다. 중정의 김재규의 입에서 나온 “나마이끼나야쭈(건방진 놈)”는 경호실에 대한 정조준의 화살이었다.
엘리트라는 허울에 쌓여 자상한 남편도, 정겨운 아버지도 못 된 남자들, 어두운 데서 말없이 충성하고 빛 없이 희생 되는 바보 같은 남자들, 결국 고래 싸움에 등 터진 불쌍한 새우 청춘들, 앞모습도 뒷모습도 없이 산산이 날아가 버린 일편단심 민들레꽃들.

재송아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애태워 하던 ‘원’이는 결국 내가 못 찾고 가겠구나. 그런데 뒷모습이 아름다운 대한의 한 여인을 보았다. 한 줄기 연고도 없이 미국에 도착한 여인, 곧바로 인연이 안 된 남편과 이혼하고 다섯 살 안팎의 두 아이를 가슴에 움켜 안고 캄캄한 미지의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가련한 대한의 여인.

한국의 간호사 자격증 하나로 40여 년 간 주야로 전심전력을 다한 아이들은 예일대의 변호사로, 브라운대학의 의사로 반듯하게 자랐고 이제 겨우 허리 펴고 한숨 돌려 못다 한 내 인생의 미련을 찾아 타고난 고운 음성으로 좋아하는 노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데 이미 해는 서산에 걸렸고 80의 백발은 세상의 눈치가 보이니 서글프지는 마음을 누가 막으랴.

뒷모습뿐만 아니고 앞모습, 마음까지 아름다운 대한의 여인아. 세상의 박수갈채를 듬뿍 받으며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백 광 알렉산드리아,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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