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빠 생각

2025-02-13 (목) 04:36:54 김에스터 라우든 카운티 공립학교 전직 교사 애쉬번,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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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이 동요는 12세의 소녀 최순애가 어린이 계몽운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8살 위인 오빠 최영주를 그리며 지었다고 전해진다. 난 이 노래를 맥클린 한국학교 성인반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지금은 모두들 하늘나라에 계시는 나의 오빠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리 가족은 공산당에게 모든 재산과 농토를 숙청당하고 남한으로 피난 나온 실향민이며 난 이북에서 피난 나올 때 언니 등에 업혀왔던 3살배기 애기였기 때문에 같이 피난 나오지 못한 오빠들에 대한 기억은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서울에 계셨던 두 오빠들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내 가슴에 꽉 차있다. 특별히 나와 25살 차이가 있는 큰오빠는 나를 유학까지 시켜준 은인이요, 엄격했지만 자상했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다른 동생들에겐 엄격하고 무섭게 대했지만 난 막내라고 귀여움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다.

내가 여중 일학년 때 국어책에 알폰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이란 글을 읽으며 대의를 써오라는 선생님의 숙제를 하던 중 질문이 있어 마침 집에 계셨던 큰오빠에게 물어보니 “한번 내가 먼저 읽어보자”하시며 이 글을 읽으시던 중 그 엄격하신 큰오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때엔 왜 그러시는지 몰랐는데 지금 팔순노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일제시대에 학교 다니실 적에 한국말을 금지시켜 학교에서 자유자재로 모국어를 쓰지 못했던 슬픔과 억압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처럼 큰오빠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우리가 무서워할 만큼 경외하는 분이셨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쎈치멘탈한 분이셨다.

고위관직에 계시던 큰오빠가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나보다 2살 아래인 내 조카와 난 이번엔 또 무슨 선물을 사오셨을까 몹시도 궁금해 식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조용히 대청마루에 가서 그곳에 놔둔 suitcase를 몰래 열어보기도 했었는데 큰오빠는 선물을 사오실 때 우리 둘이 싸울까봐 스웨터나 스커트 같은 옷은 똑같은 색깔에 똑같은 디자인으로, 내 것은 한 사이즈 큰 것으로 사오시곤 했던 공정한 분이셨다. 본인의 사랑하는 딸의 선물을 더 많이, 더 예쁜 것으로 사오실 법도 한데 절대 그런 적이 없으셨다.

큰오빠가 해외 여행에서 돌아오신 후 사진들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온 식구들을 안방에 앉혀놓고 각 나라의 명소들을 보여주시며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그런지 난 어릴 적부터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된 것도 다 큰오빠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좀 더 추억을 되살려 먼 옛날을 회상해보면 국민학교 입학 후 그 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에 안 갈래요”하며 울면서 억지를 부린 적이 있다. 이유는 아이들이 짱구라고 놀리고 어른들의 영향을 받아 평안도 사투리 쓴다고 마구 놀려 무섭고 두려워서 그랬었다. 밖에 나가서 동네 아이들과 놀면 나쁜 욕을 배운다고 우리 어머니는 내 조카와 나를 집안에서만 놀게 했기 때문에 여럿이 모여 놀려대는 아이들이 정말로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큰오빠가 철부지 없는 딸 같은 막내동생 혼내주려고 학교에 입학한다고 새로 사주신 책가방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래서 난 내가 언제 한글을 읽기 시작했는지 덧셈 뺄셈은 언제부터 알기 시작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학교에 안 가겠다고 울며 데모하는 나를 안아주며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해 ‘가나다라’에서부터 기본 산수를 가르쳐 주신 새언니에게도 이 글을 통해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다. 그리고 몇 년 지나 내가 국민학교 4학년부터는 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것도 다 착하고 참을성 많으신 하늘나라에 계신 우리 새언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빨강머리 앤’, ‘알프스 소녀’, ‘소공녀’, ‘진달래와 철쭉’ 등 세계 명작들을 읽느라고 늦게 자니 큰오빠는 이젠 공부 그만하고 밤 10시면 꼭 자야한다고 하시며 큰오빠는 시궁창에 던졌던 그 똑같은 책가방을 숨겼다가 아침에 건네주셨던 그때의 일도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 혼자 빙긋이 웃곤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지금 생존해 계신다면 김형석 교수님과 동갑 105세 이실 근엄하시고, 배우 Anthony Quin처럼 핸섬하시며 테니스를 잘 치셨던 큰오빠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김에스터 라우든 카운티 공립학교 전직 교사 애쉬번,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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