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5-02-04 (화) 08:00:06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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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인칭 대명사 ‘유(You)’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그 옛날 교수님들은 학생들에게 ‘자네’ 호칭을 종종 쓰셨다. 나도 그 소리 들어봤다. 꿈결에. 이북 출신 교수님한테서. 저 학생 지금 자네?
이제 좀체 들을 수 없는 2인칭 호칭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자네 말고도 귀하, 그대, ‘님자’처럼 들리던 임자, 여보, 당신. 직장생활 초년에 상사들에게서 종종 듣던 호칭이다. 물론 그때도 연세 드신 분들의 어투였는데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 우리끼리도 장난처럼 써먹곤 했다.

그러고 보니 나라는 1인칭 대명사와 격은 대등한 것 같아도 2인칭 대명사 너의 경우는 그 쓰는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다. 너는 물론이고 자네며 당신 소리도 잘못했다가는 “뭐 당신?” 주먹을 부르기 쉽다. 너 들어갈 자리가 그때그때 달라진다. 정과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김형은, 고객님은, 학생은, 그쪽은, 웬디엄마는….

영어는 좋겠다고 한다. 유(You) 하나로 퉁칠 수 있어서.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게 애랑 다툴 때 유 소리 한번 들어봐라. 이게 어디서 아빠한테! 내 머릿 속에 탑재한 영한 번역기의 전원을 그때는 꺼두어야 한다.


영어에는 없는 존대 때문에 한국말은 복잡하기만 하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영어도 그랬다. 유 하나만 봐도 그렇다.

유가 문제됐던 사람들이 있다. 17세기 중반 영국 시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등장한 퀘이커 교도들이다. 2인칭 복수 You 를 쓰지 않고 단수 Thou를 써서다. 영어 찬송가나 제임스 성경에서나 봤음직한 thou, thee, thy. 여기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계급사회였던 당시 상류층 높은 신분은 아랫 신분들을 대할 때 자신을 단수 아닌 복수 대명사로 지칭했다. 이를테면 나라고 할 자리에 ‘우리 양반들은’ 하는 식이다. 상대인 아랫것들도 윗사람들을 2인칭 복수로 불러 대접했다. 어르신네의 ‘네’가 집안단위의 복수 느낌이 들듯이(이건 어학 배경 없는 내 주장일 뿐이다).

퀘이커들은 이 관습을 거부했다. 누구나 내 안에 빛(inner light)이 있기에 상대의 부와 지위를 떠받드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상대를 대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를 공경해서 나온 방정환의 어린이와는 그 방향이 다르다. 끌어내리기다. 높은 것들을 낮추어 낮은 것들과 똑같이 대한 것이다.

행동도 따랐다. 높은 신분을 만나면 모자를 벗어 예를 갖추던 관습을 거부했다. 모자를 벗지 않는 사람들, 퀘이커 오트밀 포장에 남아있는 그림의 의미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만적이 아니어도 지금으로 보면 통쾌하기 짝이 없지만 신분제의 그늘이 짙었던 당시로서는 차마 봐줄 수 없는 시건방에 왕재수였다. 신분제에서는 저마다 나름 아랫것들을 깔고 있으니 버릇 없는 이들의 행태는 미친 놈 소리 들을 망언이었고 옥에 쳐넣을 죄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로드 아일랜드를 일으킨 관용의 화신으로 이른바 깨어 있던 로저 윌리엄스조차 퀘이커들의 싸가지 없는 말버릇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세월이 흘러 현대의 영어에서 유(You)는 단수 복수 다 같이 쓴다. 양반들에 대한 대접을 누구에게나 다 적용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다들 족보 사서 양반 되듯이. 그럼 이제 평등사회인가.

골치 아픈 압존법(상대존칭)까지야 몰라도, 손님 커피 나오셨습니다 하는 과공경의 사회가 따박따박 따지다가 퀘이커들이 미움 받던 그 시대와 속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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