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가고 싶은 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2025-01-30 (목) 12:00:00 박연실 수필가
크게 작게
내가 스키를 처음 배운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취미의 경지를 넘어 아마추어 스키 선수였던 남편 덕분에 아이들이 어릴 때 제일 먼저 하게 된 운동이다. 나도 아이들과 같이 배우기로 했다.

여름부터 스키와 장비 일체를 준비해놓고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방학이 되자 맘모스 마운틴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산이 깊어 온 천지가 설국을 연상케 아름다웠다.

아이들과 나는 초보자를 위한 스키 학교에 등록했다. 강사 말로는 반나절만 배우면 누구나 잘 탈 수 있다고 장담했다. 운동신경이 상당히 무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습하는 낮은 구릉도 까마득히 높은 산처럼 느껴졌다.


첫 시간은 눈밭에서 걷는 것을 배웠다. 몇 걸음씩 걷게 되었을 때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을 가르쳐줬다. 잘 넘어지는 것도 기술이고 또 잘 일어나는 것이 스키의 기본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다음은 멈추는 것을 배울 차례였다. 스키 앞날을 피자처럼 뾰족하게 모으라고 알려줬다. 강사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연신 피자, 피자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우리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초보용 구간이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아 보였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적절한 순간에 눈위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리프트가 멈추는 것이 아니고 바닥이 미끄럽기도 해서 똑바로 서기가 쉽지 않았다. 부끄러움을 견디며 여러 번 넘어진 후에야 겨우 설 수 있었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습득력이 빨라 반나절 배운 실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리프트에서 내렸다.

입으로 피자를 되뇌고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내려왔다. 몇 번 해보니 원하는 곳에 멈추는 것은 그런대로 되었다. 그러나 직진만 하다 보니 가속도가 붙어 방향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사람들은 물결 무늬를 만들면서 멋지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강사에게 방향 바꾸는 방법을 물었다. 가고 싶은 방향을 보라고. 시선을 들어 네가 가고 싶은 방향을 멀리 보면 자연히 그쪽으로 스키가 갈 것이라고 했다. 시선이 발 끝에 머물면 안 되고 멀리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에이, 그런 일이 어디 있어‘ 바라만 보아도 그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정상에 섰다. 가고 싶은 쪽을 바라 보았다. 거짓말 처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키가 물결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오직 눈을 들어 그쪽을 바라보니 몸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마음 속으로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쪽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방향이 바뀌어 내려가지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그곳으로 모든 정성과 염원을 모으면 우주의 기가 그쪽으로 흐르게 하는 이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고 싶은 도시의 지도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지도 여행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곳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몇년 후, 꿈결같이 그 낭만의 도시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전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와 본 듯한 익숙한 거리 이름이며 건물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그 도시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흘러 든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오랜 시간 그쪽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모양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횡재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그쪽으로 시선은 향해야 한다니 그 정도는 해야할 일이다.

<박연실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