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과 내일] 뱉거나 삼키거나

2025-01-29 (수) 12:00:00 공순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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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을 것인가 삼킬 것인가. 곶감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한 순간 냄새가 함께 씹혔다. 곰팡내. 1초도 참지 말고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 그 순간 판단은 뱉어라, 였고 육신은 자동 반사, 그걸 꿀꺽 삼켰다. 1초도 숫자 단위로 또 분절할 수 있다는 걸 절실히 체험한 순간이었다. 이미 식도 저 아래로 내려가 버린 곶감을 되돌릴 순 없었다.

그 결과 대상포진을 앓았다. 이후 여러 번 앓은 대상포진의 첫 경험이었다. 대상포진은 건강이 저하되거나 스트레스로 심신이 미약할 때 방어 능력이 떨어져 발병한다고 한다. 내 경우는 이 질병에 걸리기 매우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갖췄으니 말해 뭐하랴.

건포도, 호두, 씻어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블루베리, 등은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곰팡이 여부를 식별하기 어렵다. 그 후로도 가끔씩 그냥 삼킬 것인가 뱉을 것인가, 난관에 봉착했다.


이 되돌릴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태는 결국 선택의 행위이며, 비단 식재료에 국한된 일만은 아니다. 삶은 선택의 결과란 말도 있다. 그래서 결정 장애라는 신종 질환(?)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 질환은 갑자기 불려 나온 질환은 아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갈파했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서 결정을 잘하는 사람을 가끔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도 결정을 잘한다고 스스로 말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나는 결정을 망설여, 결정이 힘들어, 라고 말한다. 나는 결정을 잘해, 라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 될까. 그 기준은 편리다. 간혹 정의가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역사가 반드시 공정한 쪽으로만 흘러온 게 아닌 걸로 보아 정의보다는 편리 쪽이 우세할 듯싶다. 아니, 편리도 이차적인 문제고 생존 본능이 더한 기준이 아닐지.

남편과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전쟁 시절 인천 지역에서는 송유관에서 석유 빼돌려 생계를 이어 간 사람도 있다며 그는 그들의 생존 의지를 지혜라고 평가했다. 다섯 살 위인 그와 나 사이에 세대 차이가 드러난 셈이다. 미군 트럭을 쫓아가며 기미 쪼꼬렛을 외치던 세대. 그때 나는 거지야, 왜 남에게 먹을 걸 달라고 해? 집에 가서 밥 먹지, 라고 속으로 그들을 핀잔했다. 그러나 주변의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오히려 주변머리 없는 아이라고 핀잔주었다 선택은 처참하도록 본능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비교적 문화적이어서 이 정도가 되면 유니세프나 적십자가 나선다. 적어도 지구 공동체를 형성한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 이런 비인(非人) 탄생을 좌시하진 않는다.

이 물질의 풍요는 어디에서 온 걸까. 인지의 발달로 산물이 풍부해진 탓이다. 풍부해진 물자. 이것이 선이 될까, 해가 될까. 물질의 풍요에는 경제 논리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불변의 순환처럼 부자의 그늘 아래 노숙자가 따라온다. 난터켓 섬에 별장까지 지닌 자가 있나 하면 한 평의 잠자리조차 없는 자도 있다. 풍요에 대한 욕망이 멈추지 않는 한 가난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피라미드의 상위를 차지하는 몇 인간에 의한 욕망으로 전 지구는 전 인류는 역사는 포로기(捕虜期)로 접어들었다.

이 겁 없이 흘러가는 시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거역하고 저항할 수 있을까. 상황 통제의 능력이 있기는 하나. 기회가 있기는 하나. 그들은 편리란 이름의 사탕을 손에 쥐여 주고 약자의 삶을 가져간다. 메피스토펠레스처럼. 하여 후딱 하면 대상포진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오늘도 힘없이 고민한다. 이 풍요의 사태를 뱉을 것인가 삼킬 것인가.

<공순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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