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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4-12-10 (화) 08:07:57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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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전쟁 한복판의 커피 사랑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보스턴 티 파티, 본국 영국의 일방적인 조세 수탈에 대한 반발로 불거진 사건이다. 미국에선 삼척동자도 아는 독립전쟁사의 첫 장면이다. 원주민으로 위장한 식민지 열혈분자들이 정박 중인 동인도 회사의 배를 야습하여 그 비싼 차가 든 상자들을 보스턴 항구 앞바다에 내다버렸다.

그 배경에는 홍차 거부운동이 있었다. 한국에서 종종 불거지는 일본상품 불매와 비슷한 맥락이다. 커피가 홍차를 넘어서 아메리카의 애국음료로 자리를 잡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남북전쟁이 터질 즈음에 이르러서는 커피는 미국인의 삶에 뗄래야 뗄 수 없는 필수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전국민의 63퍼센트가 매일 마시고, 그것도 평균 석 잔 이상 마신다는 커피. 그 중독의 뿌리에 남북전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전선에 나간 병사들의 일기장이나 집에 써보낸 편지에는 보고픈 엄마, 전쟁, 총탄, 대포소리, 노예제, 링컨보다 더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커피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검색어 1위다. 연탄불 피우는 남대문시장 먹자골목 아주머니들이 찾던 박카스처럼 좀체 쉴 여유 찾기 어려운 전쟁터의 포연 속에 병사들의 기운을 차리게 해준 것이 커피였다.


물자가 풍부했던 북군 병사에게 커피 끓여 마시기가 한국군대에서 축구 찬 얘기였다면 보급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남군에게는 부족한 커피가 신세타령의 18번 레퍼토리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셰넌도어 산간을 넘나들며 북군을 괴롭히던 스톤월 잭슨의 승리 요인이 북군의 커피 탈취에 있었다면 지나친 농담일까. 전투에 승리해서 적군이 두고간 군수품을 챙길 적에 커피보다 병사들에게 더 반가운 게 없었다. 한편 잭슨 장군에게는 신선한 레몬이 승리의 열매였다는 설화도 그때 같이 생겼다. 잭슨이 레몬광이었다는 얘기는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건강 걱정으로 과일과 야채를 많이 찾았고 실제로 가장 좋아했던 건 복숭아였다나.

해군의 열세로 봉쇄를 당한 남군에게 수입품인 커피의 부족은 이렇게 고질적인 약점이 됐다. 자구책으로 커피맛을 흉내내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대체재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어 볶아서 우려내는데 도토리, 민들레 뿌리, 호밀, 땅콩, 완두가 동원되고 가장 그럴 듯하기는 치커리(chicory) 뿌리였다. 쌉싸름한 맛이 민들레와 비슷한 치커리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다육질에 긴 뿌리를 구워서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커피색과 향이 난다. 치커리 커피는 요즘도 커피 대용품으로 사랑받는다.

그래도 커피는 커피. Nobody can soldier without coffee. 커피 없이는 못 싸우겠다는 불평이 가득했다. 그러니 1인당 한 해에 36파운드, 16킬로그램을 보급받는 커피 부자 북군과 커피는 없어도 고향초 담배만큼은 넉넉했던 남군 병사들 사이에 총성을 멈추고 반짝 물물교환도 이뤄졌던 것이다. 영화 JSA 공동경비구역의 송 중사와 이 병장처럼. 한편 노예제에 반대하여 출전한 북군 병사들에게 활기를 준 그 커피가 주로 브라질의 노예농장에서 왔다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속이 쓰려 몇 달째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불만을 달래려고 찾아본 미국의 커피사였다. 전쟁 중에도 커피 한 잔의 여유가 필요하다. 여기나 거기나 나라 돌아가는 꼴은 답답하고 때론 두렵기도 하나 그럴수록 커피 한 잔의 느긋함으로 나를 달래본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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