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가슴 속에 사랑하는 왕자님이 한 분 계시다. 왕자님?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에서는 이정훈이 갑자기 동성애자가 됐나? 왕자님을 사랑하다니… 음악이니 뭐니 감성적인 얘기를 많이 쓰더니 갑자기 성정체성에 이상이 생긴건 아닐까? 그런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하더라도 나에게는 가슴 속에 사랑하는 왕자님이 한 분 계시다. 지금도 그 왕자님에 대한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여자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왕자님은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 외모 반듯하고 매너좋고 기품있는… 뭐 그런 남자들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나의 왕자님은 그런 백마탄 왕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馬)도 없을 뿐더러 말도 할 줄 모른다. 다리도 부러져 버린 그런 쓸모없는 왕자님이다. 그런데 그 나무 토막이 한 소녀의 손에 붙들렸을 때 그 왕자님은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로 변할 뿐만 아니라 마술로 깨어난 새롭게 재 창조된 왕자님으로 돌변한다.
인간이 정말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잠자는 마음을 깨우는 그런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허구의 세계라고나할까… 다른 의미에서 사랑은 비애이며 환상이며, 산 넘어 애잔히 사라지는 희미한 아픔이지만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때 더욱 그 사랑은 애절하고 간절해 지는 법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이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 소녀의 동정심과 꿈속에서 왕자님으로 돌변한 그런 환상적인 얘기가 좋아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좋기는커녕 그런 동화같은 이야기는 어른들에게 결코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러나 허구가 사랑받는 리얼리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잠자는 마음을 깨우는 예술의 힘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존재하는 대상,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많은 것을 사랑하며 살지만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 소유하고 만질 수 있는 것 보다는 저멀리 애잔히 사라지는 비애의 그림자… 아픔때문에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호두까기 작품 속에서 왕자님은 실존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실존하지 않는, 요정같은 존재이다. 요정이 터치하는 곳곳마다 마술처럼 아름다운 무지개가 피어나곤 하지만 정작 요정 자신은 갈 곳이 없어 쓸쓸히 낙엽을 맞으면서 외로움에 떠는 모습이 안타깝다. 차이코프스키의 고독이 진하게 묻어나는 음악…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남기고 이듬해에 사망하게 되는데, 그래서일까 이 곡은 마치 작별을 앞둔 지상에서의 마지막 잔치와 같은 별세계의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극장으로부터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차이코프스키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이유는 ‘호두까기 인형’에 대한 악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재정적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 때문에 깊은 실의에 빠져있던 차이코프스키는 작곡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미국 여행을 결심하게 되는데 파리에 들렀던 차이코프스키는 그곳에서 트라이앵글처럼 투명한 소리를 내는 첼레스타라는 악기를 발견, 이 악기를 활용하여 ‘호두까기 인형’을 탄생시키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호두까기 인형은 사람 절반 크기의 목각인형으로15세기때 독일 지방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등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1816년 호프만이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대왕’라는 동화를 탄생시킨게 그 내용. 크리스 마스 이브. 클라라와 프리츠 남매는 드로셀메이어 아저씨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받게 되지만 프리츠와 다투다 다리가 부러지면서 클라라의 환상은 시작된다.
차이코프스키는 미국 방문길에 누이 샤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게되는 데 남겨진 조카 ‘타티아나’를 클라라로 대입시켜 발레 음악의 금자탑 ‘호두까기 인형’의 완성을 보게 된다. 1892년에 열린 초연 무대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음악만큼은 호평받았다. 특히 첼레스타를 비롯해 장난감 북, 장난감 나팔, 여성합창 등을 삽입한 파격적인 편성의 모음곡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1944년부터 SF 발레에 의해 크리스마스 공연으로 자리잡게 된다. SF 발레가 12월6일부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한다. 출연자들과의 계약이 아직 완료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큰 이변이 없다면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도 SF 발레의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하는 홀리데이 시즌이 될 것이 기대되고 있다.
▶일시 : 12월 6일 – 12월 29일 ▶장소 : 워 메모리얼 오페라 하우스, www.sfballe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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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