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망설임

2024-09-19 (목)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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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다보니 망설임이 많다. 아주 간단한 문제 앞에서도 망설이고, 쉽게 생각하고 처리할 사안 앞에서도 망설인다. 그래서 이런 노래도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그렇게 망설이다가 날을 보내고 밤을 지새운다.

특히 현대인들은 망설임이 심하다는 진단이 있는데 그 말이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하여 결정 장애(決定障碍)가 이 시대의 질병 중 하나로 등장했다.

큰 문제도 아닌 작은 문제 앞에서 망설인다. 웃자는 얘기긴 하지만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라는 너무나 하찮은 기로에서부터 망설임은 시작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은 망설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해결책은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가 기차 정거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는 차표도 사지 않고 개찰구로 뛰어가서 역원을 붙들고 물었다. “다섯 시 35분 발 열차는 언제 출발합니까?” 역원은 태연하게, 그러나 서둘지 말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간표에 있는 대로 다섯 시 35분에 정확히 출발합니다.” 그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저기 보이는 교회당 시계는 지금 다섯 시 31분, 이쪽 은행 시계는 다섯 시 32분인데 어느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까?” 역원은 역시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느 것을 믿던 그것은 당신 자유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 시 35분 발 열차는 방금 전에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남자가 놀래서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니 다섯 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계 저 시계, 시계를 쫓아다녔으나 결국은 정확한 시간에 출발한 기차를 놓쳤다는 이 심각한 우스개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가.
생각이 많으면 번뇌가 많다는 격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다. 많은 사람들은 참 된 것, 더 좋은 것을 찾아 헤매다가 정작 잡아야 할 것을 놓치고 만다.

많은 이들은 아직도 결단하지 못하고 언제 기차가 출발하는가, 시간표에만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
결정 장애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처방약도 없고 영양제도 없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 상담을 해봐야 의사의 지갑만 불려줄 뿐이다. 그 의사조차 결정 장애를 심각하게 앓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차표를 사들고 플랫폼으로 들어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런 시가 있다. “그대는 내일 무엇을 할까, 너무 꿈꾸지 마라 / 그대가 내년에 무슨 일을 얼마나 잘 해낼까를 너무 많이 꿈꾸지 마라 / 그대는 내일의 기회를 빌릴 필요가 없다.” 오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은유다.

오늘 용기를 내서 결단해야 한다. 누군가와 서운한 감정이 있는가. 지금 전화번호를 클릭하라.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가을이 오고 있음을 먼저 말해보라. 먼저 말하는 일이 너무 어렵지만 사실은 그 사람도 결정 장애 앞에서 당신처럼 망설이고 있을테니까.

월남전이 한창일 때 한 미군 병사가 할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할머니, 나는 지금 적군과 싸우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싸우는 중입니다.” 역설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가. 인생 자체가, 결국은 나 자신과의 투쟁이며 산물이다.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그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는 진리다. 그러므로 결정 장애가 일상이다 하여 비관할 필요는 없다.
어느 분이 내게 물었다. 자기도 이제 은퇴를 하고 싶은데 망설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도 그리 잘 되지 않고 전망도 불투명하여 손을 놔버리고픈 마음이 없지 않은데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미련이 남아 있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대개 제3자가 당사자보다는 결론을 잘 내리는 편이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냥 지내세요. 누가 몰아내지 않는 한 거기 그냥 있는 게 좋습니다.” 그는 이미 은퇴를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을 입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망설임이란 결정 이후에 찾아오는 고뇌이다. 그의 망설임은 하는 일이 생각보다 부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지만 어느 순간 잘 나간다는 느낌으로 바뀔 때, 그는 결정 장애에서 탈출하게 된다. 망설임은 삶의 다양한 통과 의례 중 하나이다.

<신석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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