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와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기독교 신앙에서는 중요하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한 예를 예수님의 탄생에서 볼 수 있다.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 천사들의 찬송, 목자와 동방박사의 아기 예수 방문 등이 담고있는 성탄절의 분위기는 평화와 기쁨이다.
그런데 평화와 기쁨에 정반대 되는 성탄절 분위기를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볼 수 있다. 해산을 위해 애를 쓰며 부르짖는 임신한 한 여인 앞에 머리가 일곱인 큰 붉은 용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해산하면 삼키려는 것이다. 그 아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한다. 즉 태어날 아이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큰 용은 사탄을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사탄이 예수님의 탄생을 저지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니까 평화와 기쁨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탄생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큰 혼란과 분쟁을 야기한 것이다.
성탄절과 같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욥이라는 사람에게도 있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였다. 그런데 한 순간에 모든 자녀와 전 재산을 잃었다. 몸에는 병까지 들었고 아내는 욥을 비난하며 욥의 곁을 떠났다. 모든 것을 잃고 병까지 든 몸으로 욥은 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욥이 이러한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사탄의 도전때문이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욥을 축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욥에게 축복이라는 뇌물을 주어서 욥의 경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탄의 이 주장에는 하나님은 원래 경배를 받을 만한 분이 못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경배받을 만한 정도까지 되지 못하지만 욥을 축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경배를 받는 것이라면서 사탄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공격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셔야 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사탄에게 증명해 보이셔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아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낸 사탄은 욥에게서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욥기 1, 2장).
그러니까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욥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것을 잃은 욥이 과연 하나님께 등을 돌릴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탄의 도전에 대해 승리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왜 자신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사탄이 하나님께 도전했기 때문에 자신이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욥은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욥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욥의 고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 그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 때문에 현재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재 겪는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라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4장).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존재한다. 고난 중에 내가 보이는 반응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고난 중에 욥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사탄의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와 패배가 결정되듯이 기독교인들이 고난 중에 보이는 모습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세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결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러한 말씀을 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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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승룡 목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