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사회의 역사는 한민족이 걸어온 근 현대사의 축소판(microcosm)이자 미러 이미지(mirror image)이다. 한인사회와 한국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란 말이다.
한국의 국내 정치 현실이 큰 여과 없이 그대로 미주 한인사회에 투영되었고 미주 한인사회가 겪어야 했던 크고 작은 문제들 역시 한국의 국내 정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그런 상호작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실로 많은 사건들의 부침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는 발상 자체가 반역사적이다. 그만큼 미주 한인사회는 한국의 정치적 변화를 자신의 아젠다(agenda)로 흡수하고 이를 반영하면서 수많은 질곡의 봉오리와 험난한 계곡들을 거쳐 왔던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가 걸어간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험난했던 역사적 아젠다로는 일제 치하의 항일 독립운동과 한국의 군사독재에 맞서 미주 한인사회가 벌인 민주화 운동을 꼽을 수 있다. 19세기 전반에 있었던 항일독립운동의 발원지가 하와이였던데 비해 19세기 후반기에 있었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주된 무대가 수도 워싱턴이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런 시공의 차이를 넘어 두 사건은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적 족적을 조명하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기도 했다.
정기용 전 한민신보 발행인의 비망록 ‘서울에 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요’는 그런 미주한인사회에서 있었던 민주화 투쟁의 생생한 역사이자 감동적인 증언이다.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일정한 거리에서 지켜보고 관조한 평전이 아니라 한인사회에서 일어난 민주화의 흐름 속에 온몸을 던지고 그 선두에서 인간적 가치와 존엄을 희생하면서 한국 민주화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치열한 투쟁의 기록들이다.
낙지생근(落地生根)이라는 말이 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는 중국인 화교사회들을 두고 나온 말이다. 19세기 서양의 근대화 도전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조상들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화교들은 돌아갈 조국이 없었다. 그래서 어디든지 배가 도착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는 뜻으로 나온 말이 낙지생근이라는 4자성어였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이들 6천만 명에 달하는 화교들은 한 세기 후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덩샤오핑이 조국의 경제발전을 추진할 때 자본과 기술을 제공했다. 화려한 중화민족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중국이 꿈꾸는 중국몽의 초기 성공에는 이런 낙지생근이라는 실존적 철학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도 낙지생근과 무관할 수는 없다. 미국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미주 한인사회가 낙지생근의 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965년 개정된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국인들의 미국 이주가 본격화되었고 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한국인들의 대량 이민으로 미주 한인사회가 급격히 성장한 결과 오늘 날 2백 50만 명에 육박하는 미주 한인사회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민주화 투쟁이 치열했던 시기 동안 미주 한인사회를 관통하는 철학은 낙지생근이 아니라 수구초심(首丘初心)이었다. 몸은 미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에 있었다. 당시 재미 한국인들의 대다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은 조국이기 전에 모국이었다. 한국말이 영어보다 더 편한 모국어였고 한국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의 국내 사정을 더 많이 걱정했고 한국이 잘 되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랬다. 한인사회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호소력을 갖고 강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사적 단계는 지나갔다. 이제는 재미 한인사회에는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는 낙지생근의 시대가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야 한다.
낙지생근의 새 시대를 외면하고 수구초심을 고집하는 한 그동안 수많은 대가를 치루고 이룩한 한국의 민주화도 그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수구초심의 시대를 잊어버린 미주 한인사회가 낙지생근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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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호 34대 문화체육부 장관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