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홈(Home)과 하우스(House)

2024-09-12 (목) 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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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기술하거나 감정을 표현할 때 우리말 한글처럼 다양한 글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영어권에도 우리의 경우만은 못할지라도 있기는 있는 것 같다. 바로 Home과 House의 표현이 아닐까?

홈이라 하면 어쩐지 어머니의 따듯한 품 안처럼 느껴지나 House라 하면 큰 공간 자체의 딱딱함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억만금을 주고 하우스는 살 수 있다 해도 홈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있음을 안다.

따듯한 온돌방 아랫목에 깔아놓은 이부자리 밑으로 저녁녘에 힘들고 지쳐 돌아온 집안 식구들이 하나둘씩 발을, 손을 들이밀고 잠시 곯아떨어지거나 오손도손 그날에 일어났었던 일들을 때론 깔깔대며 때론 열기를 내뱉으며 어머님의 바글바글 끓인 호박 넣은 된장찌개 곁들인 저녁식사를 기다리던 모습이 그리우며 그것이 우리들 모두가 바라는 홈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오늘은 왠지 필자의 마음이 나도 모르게 들뜨는 날이다. 아침에 곡차(穀茶) 한잔을 들고 동네 산책길을 단축해 돌고 돌아와 생각을 정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40여년 워싱턴 DC 근방에서 살다 7-8년 전, 우리 내외처럼 1년 간격으로 L.A. 근방의 같은 동네로 이사해온 성당 교우 내외가 있다. 부인께서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 힘든 고비를 넘기고 재활병원까지 가서 지내다 거의 한 달여 만에 퇴원한단다. 원래는 2-3일 더 있으라는 권고였으나 퇴원은 무방하다는 주치의 말이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집으로, 집으로다. 마치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는 군가처럼 말이다.

얼마나 자신의 손떼며 숨결이며, 냄새가 풍겨있는 따뜻한 자기 집이 그리웠겠는가.‘There is no place like a home!’이라는 그 유명한 노래가 있지 않는가. 오죽했으면 복철에 집에서 만든 삼계탕이라기보다는 닭죽에 가까운 것을 조금 가져다 드렸는데 “꿀맛”이었다는 말이 인사치례 말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모든 게 그저 그립고 그리울 뿐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럴 때 왜 홈리스 피플(Homeless People)들 생각이 나는 걸까? 그리 종교적이지도 아니하고 남들을 크게 배려하고 지도하는 입장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말이다.

얼마 전 가주 주지사 행정명령 발동으로 이들의 임시움막들을 강제 철거하며 마치 골치 아픈 이들의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한 기사를 보았다. 물론 정신건강, 위생과 사고(화재, 절도 등등)문제가 있겠으나 주 정부 차원에서가 아니라 연방정부 차원의 사회복지의 큰 틀에서 중지를 모아 해결해야할 정치적으로 난제 중에 난제임이 틀림없다.

사회적 최저 약자 중의 약자들을 구할 방법을 정녕 찾을 수는 없겠는가?

<문성길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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