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이면 내가 미국에 이민온 지도 반세기가 된다.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사용하던 ‘세기'라는 단어가 내 삶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미국에서 참 오래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는 1974년 8월 말, 한국에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7세에 미국으로 왔다. 나와 어머니, 그리고 두 여동생과 함께였다. 당시 1년 먼저 오셔서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시에 우리 가족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 두신 아버지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이라 김포공항에서 출발했다. 그 전에 베트남에서 기술자로 일하셨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우리 가족 모두 비행기 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대한항공이 아직 미국 동부로 취항하지 않아서, 지금은 사라진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미국에 왔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면 공항 청사를 나와 비행기까지 걸어가 트랩을 올라야 했다. 청사에는 떠나는 가족들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할 수 있는 환송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친지들이 먼 이국으로 떠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눈물로 작별을 고하곤 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우리가 탄 비행기는 먼저 일본 도쿄에 기착했던 것 같다. 이후 같은 비행기로 계속 이동했으며, 다음 기착지는 미국, 아마 시카고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입국 수속을 밟았다. 물론 이민 가방들도 모두 챙겼다. 당시 영어라고는 한두 마디밖에 못 했던 내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대구에서 온 다른 한 가족까지 책임져야 했다. 김포공항에서 처음 만난 그 가족은 아버지와 미국에서 1년 정도 룸메이트로 지낸 분의 젊은 부인과 두 어린아이였다.
문제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워싱턴 덜레스 공항으로 가는 연결 항공편을 찾는 것이었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인 데다 영어도 못 했기에 주위에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를 의지하는 두 가정 6명을 이끌고 연결편 탑승구를 찾아 늦지 않으려 손목시계를 계속 보며 서둘러 걸었는데, 아뿔사 반대 방향으로 갔다. 맨 뒤에는 다섯살 막내 여동생이 큰 가방 하나를 힘겹게 끌고 가족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나를 찾는 장내 방송을 알아듣지 못해 결국 항공사 직원들이 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연결 항공편이 떠난 후였다. 항공사 직원들은 우리를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며 안심시켜 주었지만, 그날 밤 출발하는 다른 비행기에 우리 가족 4명만 탈 수 있었다. 항공사 직원이 장거리 전화 사용을 허락해 주어 버지니아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두 아이와 함께 뒤에 남아 항공사에서 마련해 준 호텔로 옮겨 하룻밤을 보내게 된 미국 초행의 젊은 어머니가 겁에 질려 흐느끼는 모습을 뒤로 하고 떠나면서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그렇게 나는 미국 이민 신고식을 치렀다.
그 후 50년이 흘렀다. 첫 10년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데 보냈다. 한국에서 이미 고등학교 1학년을 마쳤지만, 내가 등록한 학교에서 다시 10학년부터 시작하도록 허락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마쳤고, 대학교는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대만에서 보낸 1년을 포함해 4년이 걸렸다. 그 후 로스쿨에서 3년을 더 공부했다. 학업을 마친 후 첫 10년간은 변호사로만 일했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시작해 1980년대 후반에 애난데일로 사무실을 옮겼다. 그리고 1995년에 교육위원직에 도전해 변호사 업무와 공직 생활을 병행한 지 30년이 되었다.
그동안 미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장성했고, 손녀도 하나 태어났다. 고등학생이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렇게 50년을 살았어도 아직도 영어는 어렵고, 미국에서의 삶이 항상 편한 것은 아니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고국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이민자로서의 삶에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공허한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요즘 변호사 업무에서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은퇴 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0년간 천직이라고 여기며 해오던 일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나를 긴장시키고 있다. 마치 또다시 이민을 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
문일룡 변호사, VA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