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기원

2024-08-14 (수) 주동완 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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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합병한 ‘한일병합조약’이 1910년 8월22일 체결되고 8월29일 반포되었다. 반포와 동시에 ‘대한제국’은 다시 ‘조선’이 되었고 1910년 8월29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기간은 정확하게는 34년 11개월 17일이다. 35년도 안 되는 기간임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제시대의 기간을 36년으로 표현해 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제의 탄압 기간을 강조하기 위해 35년에서 36년으로 늘렸다는 설이 있고, 한국에 관습적으로 사용해 오던 ‘세는’ 나이처럼 계산하다 보니 36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1980년대 말 교육부에서 제4차 교육과정 개편 때 초중고 교과서에 35년으로 정정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교육되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1949년 11월9일자 경향신문 2면에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새해 그리고 공무원의 노래 가사 모집 광고가 났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주의운동에 가담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한학, 역사학을 가르쳤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지은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의 노래 가사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정인보는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 중 한글날을 제외한 4대 국경일을 기념하는 노래의 작사자가 되었다.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광복절’ 노래의 1절 가사는 이렇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당대의 석학 정인보는 일제시대를 40년으로 규정했다. 정인보는 일제시대를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17일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을 일제시대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40년간의 일제시대 동안 조선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과 조병세는 여러 날에 걸쳐 을사조약의 무효 상소를 올렸다. 민영환은 11월30일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조병세는 12월1일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글과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06년 1월29일 고종은 을사조약 무효선언서를 국서로 작성하고 6월22일에는 프랑스 대통령에게까지 친서로 보냈다. 이어 고종은 1907년 6월15일 이준, 이위종, 이상설 등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제의 압력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은 이준의 죽음만 안고 돌아왔으며 이 일로 고종은 폐위되었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은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제1대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이 모두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이루어진 조선의 독립운동이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04년 8월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이승만은 11월4일 제물포항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여 1904년 12 31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1905년 2월 조지워싱턴대 2학년에 입학한 이승만은 그해 8월 하와이에서 온 윤병구 목사를 만났다.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의 운명을 멀리서 체감하고 있던 하와이의 7,000여 명의 조선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500달러를 거두어 윤병구에게 주었다. 이승만과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905년 8월5일 뉴욕에 있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여름 별장인 사가모어 힐에서 루즈벨트를 만난 이승만과 윤병구는 하와이 조선인들의 염원이 담긴 ‘조선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다.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나 외교적 절차상의 문제 등으로 비록 이승만과 윤병구는 그들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기원을 이루었다.

이승만과 윤병구가 1905년 8월5일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시작을 열었던 것과 함께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였던 한인들의 대한민국 독립을 위한 열망과 의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동완 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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