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이 민권법 Civil rights act of 1964가 제정, 공포된 지 60년이 되는 해다. 환갑이다. 사각지대에 있던 흑인 인권을 법으로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예제도를 타파하기 위한 남북전쟁(1861-1865)이 성공한지 99년만에 성취한 법이다.
1960년 Fort Belvoir, Virginia 미 육군 공병학교 초등군사반 교육시절에 목격한 흑인차별을 회고한다.
“Dogs and Blacks are not allowed” 간판을 비치하고 영업하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공중화장실이 흑. 백인용으로 분리된 건 기본이었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흑인장교에게 주말에 워싱턴 시내로 외출하자는 제의를 거절하던 이유가 그것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흑인 차별을 합법화한 대법원 판례를 소개한다.
Scott v. Sandford, 60 US 393(1857)부터 설명한다. 대법원은 아프리카 후손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고 7대2로 판결한다. 국회는 미국 내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할 권한이 없다고 Congress has no authority to ban slavery from a Federal territory를 명한다. 흑인을 인간으로 취급하기를 거부한 최악의 판례다. 186년 노예해방 남북전쟁이 끝나기 8년 전이며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되기 107년 전의 대법원 판례다. 모두에게 교훈이 되는 판례로 기억되길 바란다.
Plessy v, Ferguson, 163 US 537(1896) 은 기차의 백인전용 객실에 흑인 Plessy가 앉았다가 쫓겨난 사건이다. Scott 사건과 다른 점은 헌법 14th Amendment(1868)가 남북전쟁 후 헌법에 추가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주(州)는 누구에도 동등한 법의 보호를 거부할 수 없다.” Plessy를 보호해야 하는 헌법임을 묵과하고 대법원까지 항소 되지만 대법원도 헌법이 보장하는 동등한 법의 보호는 안중에도 없었다. 7대1로 Plessy 패소를 판결한다. 판결의 요지는 흑백승객을 분리운송했다 하더라도 같은 서비스를 제공했음으로 차별이 아니라는 논리다. “Separate, but Equal” 판례로 전해지는 사건이다. 다수의견에 반대한 대법관 Johan Marshall Harlan을 위대한 반론자 Great Dissenter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Brown v. Board of Education 347 US 483(1954)이 출현한다. 그때는 흑인아동은 흑인학교에, 백인아동은 백인학교에 등교했다. 흑인 Brown을 백인학교에 입학시키려다 거부되자 Brown이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다.
교육위원회는 Plessy 판례의 분리하지만 동등한 교육을 시행한다는 Separate, but Equal 논리로 방어를 시도하지만 대법원은 전원 일치의견으로 “공립학교를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다. 교육시설을 분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평등임을 선언한다.”
판시에서 미국의 고질병은 흑백 간의 갈등이다. 어린아이 때 통합을 이루어야한다. 같은 체육관에서 몸을 부딪치며 같은 교실에서 수업하면서 이질감을 해소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맞는 말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타인종에 대한 이질감이 없다. Barak Obama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이렇게 자란 유권자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고 확신한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 흑백 아동이 함께 수학하며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팀에 흑백아동에 섞여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때는 그러한 혼성팀은 불가능했었다. 백인 거주지역에서 버스로 백인아동을 흑인지역 학교로 운송하고 흑인지역 아동을 백인지역 학교로 운송하던 Busing을 기억할 것이다. 반대하는 학부모를 저지하기 위해 예비군을 투입한 곳도 있었다. Brown v. Board of Education은 고질적인 흑백 갈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한 최고의 판례로 환영한다.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이 브라운 사건 10년 뒤에 탄생한 것도 브라운 사건의 성과가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평가한다.
John F. Kennedy 대통령과 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흑백간 불화를 잠재우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다.
1963년에 사망한 케네디는 민권법 탄생을 못 보고 후임 대통령 Johnson이 서명 공포한다. 킹 목사의 1963년 연설에 국민이 동감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1968년 4월4일 James Earl Ray의 총탄에 39세 나이로 타계한다. Ray는 영국으로 도주하지만 미국 법정으로 인도되어 99년형 언도를 받고 복역중 29년을 복역한 1998년 간염Hepatitis로 70세에 사망한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제정된 1964년 민권법이 정착하는데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흑인에게 봉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식당, 이발소 등을 닫는 예가 있었고, 고객을 거부하는 것은 업주와 고객 간에 있을 수 있는 상행위일 뿐인데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권법 무효소송이 잇따랐다. 법리적으로는 맞는 주장이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대법원이 결국 합헌으로 결정한다. 민권법이 국민화합에 기여하는 법으로 정착되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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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탁 변호사/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