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같은 중학교에서 가르치다가 “한국이 좋아” 서울에 있는 국제학교로 간 친구가 있다. 우리 또래의 아직 젊은 백인 아줌마다. 그동안 카톡통신으로 간간히 서울소식을 전해 왔는데 이번에 방학을 맞아 돌아와서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둘의 폭풍수다가 터지는 걸 보며 일을 나갔다가 오니 아내가 새로 배운 단어를 자랑한다.
LBH가 뭔지 알아? 모르지?
- LGBT 그런 건가(관심 없다….)
Loser Back Home! 몰랐지?
- 그게 뭔 말이래?(LBJ는 린든 존슨 대통령, 그런 거나 알아두시지….)
미국에선 별볼일 없는데 한국 가서 영어 좀 한다고 설치는 애들을 그렇게 부른대.
- 아, 집에선 찌질이 그런 말인가 보네.
외국인, 정확히는 백인의 형상만 갖추면 웰컴 투 코리아, 미제 딱지만 붙으면 어중이 떠중이도 원어민 교사로 대접받는다는 건 쌍팔년도 얘기 아니었나? 아직도 먹힌다네. 그러니 저런 약자가 돌지.
하나를 배웠으면 하나를 가르쳐줘야 하는 법. 그게 부부의 도리 아닌가. 나도 카드 하나 꺼내든다.
- 그러니까 카펫배거 같은 거구나. (색색버거 아니냐고 차마 묻지는 못하시고)
- 아, 몰라? 처음 들어봐?
그게 아니고….
- 그럼 그럼 생각 안 날 때가 있지(이쯤해서 멈추는 게 사랑과 평화).
카펫배거(Carpetbagger)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 진압 당한 반군의 처지로 연방군의 치하에 놓인 남부에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내려와 권력과 이권을 차지하고 호가호위했던 북부 출신 뜨내기들을 일컫는 말이다.
90년대 중반께에 이 말을 접했는데 그때가 북한붕괴론에 빠져있던 YS 정부가 감나무 아래 드러누워 침만 꿀꺽대던 시절이다. 정치권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한몫 잡는 꿈에 들뜬 인간들이 있었다. 어수룩한 그쪽 사람들 속여 먹기는 일도 아닐 거고, 될 땅 안될 땅 잘 골라 투자하면…. 그렇게 양아치가 되어가는 면면들을 연상해서 배운 단어라서 그런지 쏘옥 머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때는 인터넷도 편하지 않고 구글도 없을 때라 카펫 백(Carpet bag)의 이미지를 잘 몰랐다. 담봇짐, 괴나리봇짐, 보따리장사 그런 맥락인 줄은 알겠는데 카펫이란 단어가 헷갈렸다. 돗자리 깐다는 말처럼 아무데서나 잘 수 있게 카펫을 들고 다니나, 그렇게 생각했다. 배거(bagger)는 거지, 베거(beggar)로 들리기도 했고. 그러다가 이 땅에 구글 신이 강림하시와 비로소 깨우치게 되었으니 카펫처럼 질긴 천으로 만든 가방이 당시 이민가방으로 유행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영화 메리 포핀스에서 줄리 앤드류스가 들던 그 가방이었구나.
그러다가 카펫배거 소리를 다시 들은 건 힐러리 클린턴이 2000년 뉴욕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해서다. 뉴욕주에 산 적도 없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타지인이 어디를 넘보느냐며 공화당 정적들이 시비를 걸며 이 말을 꺼냈었다.
뭐 별것도 아닌 얘기를 길게도 쓴다고 하실텐데, 내가 원래 하나를 배우면 열개로 변형해서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이다. 뭐 어쩔…?
카펫배거가 타지인이라면 북군에 협조하던 현지인을 경멸하며 일컫는 표현으로 스칼라웨그(scalawag, scallywag)가 있다.
원래는 돈이 안 되는 비실비실한 가축을 부르던 말이라고 한다. 사료값도 안 나오는. 그러니까 자기들 눈에는 변절자들을 연방군에 빌붙은, 밥값도 못 하는 못난 놈 그렇게 부르던 욕이다.
그 딱지가 붙은 대표적 인물로는 로버트 리 장군의 오른팔이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공화당에 협조하여 연방정부의 관료로 요직을 두루 거친 제임스 롱스트릿 장군이 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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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