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4-06-25 (화) 08:04:55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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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알게 된 페어팩스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어디 사는지. 이게 다 2018년의 화제 드라마 스카이캐슬 덕분이다.
군대에 가니 고참이 묻는다. 야 신병, 너 어디서 왔어? 넵! 신병 정신병 서울에서 왔습니다. 뭐 서울이 다 너네 집이야, 박아!

그때 대가리 박던 트라우마가 이민 와서 거꾸로 되살아난다. 미국 어디 사세요? 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요.(잉)
못 알아들으니 자꾸 부연설명을 붙인다. 워싱턴 DC 옆에 붙어 있는데요. 아, 워싱턴이요? 워싱턴 사시는군요. (아닌데)

그래서 그냥 워싱턴 산다고 거짓! 말한다.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 저먼타운에 살 때도, 남쪽 갔다가 다시 와서 버지니아주 라우든 카운티 애쉬번에서 살 때도 그냥 워싱턴 산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조지아주 귀넷 카운티 덜루스에서 잠시 살 때도 애틀랜타 산다고 말했구나.


그나마 조지아와 애틀랜타는 행정구역에 일관성이나 있지 워싱턴은 완전 아닌데, 김포 살면서 특별시민인 척 하는 셈인데. 더군다나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가 떠억하니 따로 있어 무지 찜찜했었는데 이제는 당당하다. 넵, 벌쥐니아 삽니다. 넵, 페어팩스 삽니다. 뉴욕에 짓눌려 살아왔을 뉴저지 올드타이머들은 이 기분 아실 거다.

Fairfax! 살기는 좋아도 부르기는 힘든 동네다. 한국분들 영어발음에 쥐약인 f가 두 개에다 r까지 들어간다. 이십여 년 전에는 반반 타협해서 훼어팩스라고 쓰기도 했다. DC, 메릴랜드와 경계를 짓는 포토맥 강의 남쪽, 정확히는 남서쪽, 그래서 강남이라 자처하곤 하는데 90년대 이후 미 전역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늘어난 동네로 꼽을 수 있다.

미국의 지명은 원주민이 쓰던 걸 그대로 쓰거나(셰넌도어, 포토맥), 떠나온 유럽의 고향 이름을 따거나 혹은 의주-신의주처럼 뉴자 붙여 신천지를 펼치거나(뉴욕, 뉴암스테르담), 성경에 나온 지명을 갖다 붙이거나(베다니, 르호보스), 영국 왕실에서 땅을 하사받은 귀족의 이름 따라 부르는 경우로 대충 나눌 수 있다. 윌리엄 펜에게 준 숲, 그래서 펜실베이니아다.

버지니아의 북부는 카메론의 페어팩스 경으로 불리던 스코틀랜드 귀족가문의 땅이었다. 메릴랜드는 볼티모어 경의 영지였고. 식민지에 땅을 가진 귀족들은 현지에 대리인을 보내서 지대를 챙겼지 여기 와서 산 것은 아니다. 그런 부재 지주들 중에서 여기서 살고 또 묻힌 유일한 사람이 6대 페어팩스경 토마스(1693~1781)다.

외가도 빵빵해서 셰넌도어 아래 지금의 컬페퍼까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토마스는 어느날 런던의 한 신문에서 자기 관리인의 부고를 읽다가 그가 남긴 재산이 엄청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버지니아 식민지 총독의 연봉이 2백 파운드였는데 현찰만 50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1만 파운드! 1735년 대서양을 건너와 직접 확인해 보니 그동안 대리인이 떼어먹은 게 장난이 아니었고 그는 직접 관리에 나섰다. 독신이어서 그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기름진 땅 9천 에이커에 서른 군데 농장을 일궜던 대지주 페어팩스. 소작인들과 노예들에게는 어떤 지주였는지 모르나 어린 조지 워싱턴에게는 잘해줬다. 사돈의 팔촌으로 한참 어린 열여섯 살 청년 조지를 소개받고 자기 땅을 측량하는 일감을 맡겼다. 조실부모하고 큰형 밑에서 힘들게 컸던 조지에게는 취업의 은인이다.

피 튀기는 독립전쟁의 와중에서 페어팩스경은 당연히 왕당파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지 워싱턴을 위시한 버지니아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를 핍박하지는 않았다. 이 동네유지는 아름다운 셰넌도어 계곡의 자택에서 88세로 평온하게 삶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정도는 알아야 어디 가서 페어팩스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스카이 캐슬의 페어팩스파 제니퍼 킴이고 로라 정이고 약쟁이 조선생이고 간에 잠깐 살다가 가면 모른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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