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유명 관광지는 ‘한국인 반, 일본인 반’이란 말이 돌 정도로 한국 사람들로 넘쳐난다. 코로나로 3년간 봉쇄됐던 문이 열린데다 수십년만의 엔저로 물가가 한국보다 싸다 보니 너도 나도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사카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인이 많이 오는 후쿠오카에서 불과 차로 한시간 거리인 사가현은 찾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나 이곳만큼 한반도와 관계가 깊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현은 일본에서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한국인들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관부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진짜 현해탄은 사가의 주요 도시 가라쓰 (한자로는 당진, ‘당나라로 가는 나룻터’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당’은 외국 전체를 대표한다) 앞바다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백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가카라시마 섬이 있다. 이는 일본을 대표하는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에 나온 내용으로 한때 의심받았으나 무령왕릉에서 일본에서만 나는 나무로 만든 관이 발견되면서 신빙성이 커지고 있다. 아키히토 천황은 2001년 ‘속일본기’를 언급하며 간무 천황의 생모가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말한 바 있고 간무 자신도 백제 왕족은 자신의 외척임을 시인한 바 있다. 교토에는 간무의 생모와 그 조상을 섬기는 신사가 있다.
사가와 한반도의 인연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라쓰 인근에는 요시노가리(‘좋은 들판의 마을’이라는 뜻)라 불리는 일본 최대 신석기 유적지가 있고 여기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3세기까지 600년 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이 마을의 탄생과 함께 기원전 1만4천년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일본에 퍼져 있던 조몬 시대(역사상 가장 오래된 밧줄 무늬 토기에서 붙여진 이름)는 끝나고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다.
야요이 시대의 특징은 쌀 농사와 청동기 사용으로 여기서 발견된 청동검의 형태는 한반도 남부 것과 너무나 똑같아 여기서 건너온 사람(도래인)이 만든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 매장하는 옹관묘나 도기 형태도 거의 같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유골의 크기나 형태는 원주민 것과 확연히 달라 한반도에서 쌀 농사와 청동기 제조법을 아는 사람들이 건너와 이 마을을 만들었음을 확인해 준다. 기원전 3세기는 고조선 말기로 혼란 중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밀려 남한 거주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원주민을 지배하며 상류 계층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사가가 이처럼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직선거리로도 제일 가깝거니와 해류의 영향으로 건너오기 쉽기 때문이다.
사가와 한반도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7세기 가라쓰의 번주 데라자와 히로다카가 심었다는 100만송이의 해송 숲 ‘무지개 송림’에서 바라보는 가라쓰 앞바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지만 이곳은 조선 최악의 재난 임진왜란이 시작된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에 오사카를 제외하고는 일본 최대 규모인 히젠 나고야란 성을 쌓고 그곳을 조선 침략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임진왜란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곳도 여기다. 이곳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일찍부터 조선의 도공에 눈독을 들이고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였음에도 본대보다 많은 1만2,000명을 이끌고 참전해 도공을 닥치는대로 납치해갔다.
그가 잡은 도공 중 한 명인 이삼평은 10여년 동안 각지를 돌아다닌 끝에 1616년 이곳 아리타라는 마을에서 양질의 백토를 찾는데 성공한다. 1616년 그전까지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만들 줄 모르던 일본에서 조선 도공의 손에 의해 처음 도자기가 탄생한다. 이삼평은 ‘도자기의 신’이자 이 지역의 은인으로 추앙되고 일제 시대인 1917년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제작된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만든 도자기는 일본 전역은 물론 유럽으로까지 날개 돋친듯 팔려나가며 사가를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고장으로 만들어준다. 사가의 10대 번주이자 개명 군주인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선대 번주의 17번째 아들이었음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17살에 번주가 되며 그 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암스트롱 대포 등 최신 무기를 수입해 사가 번을 가장 부강한 지역으로 만든다.
그는 일본에서 종두법을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신하와 주민들이 불안해 하자 자기 자식에게 우선 접종시켜 안심시켰다. 그리고 일본에서 처음 반사로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고성능 무기를 만들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은 지금의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인 사쓰마와 조슈였지만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것은 사가의 군대와 무기였다. 그리고는 그 여세를 몰아 결국 조선을 집어 삼켰다. 그 원동력이 결국 조선 도공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로 만든 도자기였으니 한국인이라면 땅을 칠 일이다. 이런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현해탄의 잔물결은 가라쓰의 해변을 무심히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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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