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백세 즈음의 행복

2024-06-03 (월) 한달용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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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세 생일인 2월20일을 깃점으로 해서 생긴 일이, 마치 어제의 경험처럼 생생하다. 백년을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면, 그 시간들은 놀라운 경험과 값진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보편적으로 백세를 넘긴 이들의 특질과 삶 속에서 발견되는 작은 행동들과 취미들을 떠올리며 나 역시 이들과 동격의 생활방식에, 이 글을 통하여 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백세를 넘기기 전에는 방금 한 말도 기억 못했으나, 백세 문턱에 들어서면서 놀랍게도 기억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를 보냈던 고향에서의 일들이 하나둘씩 새록새록 떠오르고, 손자녀들의 이름들도 줄줄이 기억해냈다. 심지어는 44년간 단 한 번도 호명하지 않았던 둘째사위 이름마저 또렷이 부르는 참에, 마침 문안 중이던 본인이 “예!” 소리 내며 움찔 놀라워했다.

딸이 문안 올 때면 나는 종종 정동원의 트로트 송을 메들리로 들려달라고 청한다. 이윽고 노래가 흘러나오면 내 손바닥은 짝짝 소리를 내며 가락을 맞춘다. 그런 내 행동에 딸도 합세하면서 병실 안은 소란스러워진다. 재활병원 병상에서 약 4년여 생활 중이지만, 나의 처지에 대해 풀이 죽거나 비애의 감정을 지닌 적이 없다. 되레 함께 병실을 이용하는 동병상련이들에게 격려와 용기의 말을 건네며 그들과 마음의 정을 나눈다.


백년을 산다는 건 단순히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이치를 지닌다. 그것은 인생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자애심을 키우는 과정이다. 백세 즈음에 이르러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마치 자정 지나고 새벽이 오는 자연 현상처럼 기억력이 환원된 놀라운 기쁨이 돋아나는 순간이다.

백세를 넘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몇가지 공통된 기질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간단 신선한 식단을 마주하고, 몸에 부담되지 않는 가벼운 운동, 긍정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사회적 관계 유지를 비결로 들 수 있다. 나 또한 이것들을 일상화한다.

나의 하루는 간단한 기지개 켬으로 시작하고, 소박한 건강 식단으로 식사한다. 그리고 매일 손자들과 영상 통화를 하며, 얘기를 듣고 함께 웃는다. 나는 젊을 때부터 글쓰기를 즐겼기에, 지금까지 버릇 같이 남아 메모 형식의 일기를 매일 쓴다. 생각과 느낌을 기록하노라면 정신을 맑게 해 기억력을 고양시키기에….

인생의 일기를 100으로 설정했을 때, 캄캄한 밤이 샌 후면 미명의 빛을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추억과 희열이 솟구친다. 이 이치는 백세를 넘긴 나의 삶에서도 분명히 적용된다. 매일 아침 새로운 날의 시작을 맞이하며 주어지는 기회와 도전에 마음 설렌다.

백세는 이제 단순히 숫자를 말하기보다 한 문장을 연결 고리 짓는 수사로 사용되는 게 마땅하다. 백세 즈음에 체득한 내 깊어진 삶속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세 즈음에,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와 서운함을 분리 정돈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평온을 희구한다. 그리고 여명 내내 온갖 꿈을 꾸며 자고 나고 싶다. 이러한 삶의 여정 속에서 나는 진정한 환희를 찾아낸다. 백세 즈음의 행복, 그것은 꽁꽁 얼어붙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해빙되어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짜 맞춰지듯이, 찾은 환각의 기쁨을 통해 매일매일 새롭게 살아가는 일이다.

<한달용 / 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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