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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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자락 뒤늦은 ‘벚꽃 엔딩’ 꽃잎 지고 초록이 핀다

2024-04-26 (금) 글 =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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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병곡마을-수승대-덕천서원-창포원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최영미 시인의‘선운사에서’의 한 대목이다. 어디 선운사 동백만 그럴까. 올해 벚꽃은 예상보다 늦게 피고, 기대보다 일찍 마무리되고 있다. 경남 거창에는 숨겨진 벚꽃 명소가 여럿 있다. 대규모 군락이 아니어서 축제도 없고 사람이 몰리지도 않는다. 주민과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여행객만 호젓하게 산골의 황홀한 봄 정취를 만끽한다. 대개 선현들이 미리 점찍은‘풍경 맛집’ 주변이다. 지난주 절정이었으니 지금쯤이면 바람에 날린 꽃잎이 바닥을 하얗게 덮었겠다. 봄꽃이 지고 나면 산자락으로 오르는 초록이 눈부시다.

■아는 사람만 아는 능수벚꽃 명소, 병곡마을

병곡마을(병기실마을)은 남덕유산 자락에 위치한, 거창에서도 산골 오지다.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빼재를 넘으면 거창 고제면 삼포마을이고, 이곳에서 다시 고갯마루를 두 번 넘어야 북상면 병곡마을이다.


도로가 개설되기 전까지는 동업령을 넘어 무주 안성면에 닿을 수 있었다. 동업령은 해발 1,320m 고개로 영호남을 잇는 장삿길이었다. 병곡마을은 양쪽이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적고 열대야와 황사가 없는 청정지역이라 자랑한다. 말인즉슨 크게 내세울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산골마을이 꽃 피는 봄이면 반짝 주목을 받는다. 함양으로 가는 37번 지방도에서 갈라지는 마을 안길 약 4㎞ 구간에 가로수로 심은 능수벚나무가 분홍빛 꽃가지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능수버들처럼 가지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모양새라 수양벚나무라고도 부른다.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분계천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주변 좁은 들판에는 푸릇푸릇 새싹이 돋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꽃가지가 산뜻한 봄 색깔과 어우러지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한곳에 나고 자라도 생육은 제각각이다. 개화는 지난주 절정이었지만 아직 망울을 품은 가지도 더러 있어 이번 주까지는 꽃잎이 흩날리는 산골의 봄 정취를 즐길 수 있을 듯하다.

■거창 대표 관광지에 퇴계의 흔적이

병곡마을에서 거창읍 방면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남 제일의 동천(산천으로 둘러싸여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자랑하는 수승대가 있다. 옛날 안의현(현재 함양군 안의면) 땅이었을 때는 ‘안의삼동’의 하나로 꼽혔다.

원학동 계곡으로 불렸던 위천 한가운데에 넓은 암반이 형성돼 있고, 섬처럼 고립된 작은 바위 봉우리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명승지다. 거북바위라고도 부르는 바위 둘레에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남긴 무수한 이름과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랜 옛날부터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수승대의 애초 명칭은 수송대였다.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이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었다는 의미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이별주를 나누는 모양새가 빼어난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 탓일까. 훗날 퇴계 이황이 이곳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발음이 비슷한 수승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수승대에는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요수정, 관수루, 구연서원 등이 어우러져 있다. 철재다리를 가로질러 맞은편으로 솔숲 산책로가 연결되고, 이른바 ‘물멍’하기 좋은 곳에 요수정이 위치하고 있다.

돌아올 때는 거북바위 바로 위 암반에 놓은 석교를 건넌다. 방문객들이 주로 인증사진을 찍는 곳이다. 계곡을 건너면 구연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중종 35년(1540) 요수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서당이었는데, 숙종 때 거북바위에서 이름을 따 ‘구연서원’으로 개칭했다. 신권은 갈천 임훈,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학파 중 경상우도의 학풍을 형성한 인물이다. 서원은 구한말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남았다. 물결처럼 휘어진 관수루 기둥이 예술이다.

이 정도만 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최근 계곡 상류에 출렁다리를 놓아 산책 구간을 늘렸다. 솔숲으로 난 탐방로를 따라가다 출렁다리 입구까지 제법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길이 240m 출렁다리는 높이에 비해 아찔하다. 현실적으로 공포를 체감할 수 있는 높이여서 오싹함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인근 영승마을 역시 수승대와 마찬가지로 퇴계의 영향으로 ‘영송’이라는 본래 이름에서 개명된 경우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이황이 장인 권질을 찾아왔다가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보낸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영승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서동왕자를 만나러 마을 뒷산(아홉산) 취우령을 넘어가다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영승마을 앞에는 수승대에서 이어진 위천이 흐르고, 물가에 사락정과 영승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사락정의 사락은 ‘농사짓고 누에 치며, 물고기 잡고 땔나무하는 즐거움’을 이른다. 퇴계가 이른 봄 영승마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읊은 ‘영승촌의 조춘’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퇴계의 시는 사락정에 걸려 있다는데 대문이 굳게 잠겨 있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벚꽃은 늦었지만, 창포원엔 봄이 활짝

용원정과 덕천서원은 거창의 소문난 벚꽃 명소다. 아쉽게도 지난주 이미 절정을 지나 화사한 벚꽃놀이는 내년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마리면 용원정 앞에는 작은 하천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다. 쌀 1,000석을 들여 만들었다고 해 ‘쌀다리’라 불린다. 정자와 이 다리 주변에 10여 그루의 벚나무가 가지를 펼쳤는데, 아담한 계곡과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빚는다. 지난 11일 흐드러진 벚꽃 아래서 작품 하나 건지려는 사진작가와 모델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인근 덕천서원은 영천 이씨 후손들이 세운 서원인데, 바로 옆에 조성한 저수지를 빙 둘러 가며 심은 벚꽃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봄 풍광을 빚는다. 지난주 이미 수면에 떨어진 분홍 꽃잎과 연둣빛 버들가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번 주는 꽃잎이 수면을 가득 덮을 것으로 보인다.

<글 =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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