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베사메 무초와 라일락

2024-04-23 (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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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베사메 무초와 라일락
식당, 마켓, 공사판에서 히스패닉 이민자들이 여기 한인들의 일상에 들어온 지도 제법 됐다. 이웃에 친근함을 나타내려고 아미고~ 한마디 건네는 것은 좋은 모습이다. 저들도 우리를 보면 안녕하세요 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자신있게 던지는 2구, 베사메 무초! 이게 잘 통하지 않는 데 있다. 가뜩이나 큰 눈만 껌벅거린다. 당연히 알고 좋아할 거라고 던진 회심의 마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다.

이건 첫째로 세대차이다. 나이 든 이민자들은 그런대로 기억하지만 한인들이 접하는 대부분의 히스패닉들은 이십대다. 그러니 여기서 자란 울 딸을 노래방 데리고 가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같이 부르자는 격이다.


나라 차이이기도 하다. 일단 우리 동네는 베사메 무초가 태어난 멕시코 출신이 별로 없다. 대개 그 아래 올망졸망 소국들에서 왔다. 미국 국경 넘기 보다 멕시코 땅 통과하면서 겪는 고초가 더 험한 탓에 이들은 멕시코라면 고개를 내젓는 경우가 많다. 우리더러 차이니스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 하듯이 메히까노라고 부르면 몹시 싫어한다.

우리가 특히 베사메 무초를 잘 알고 좋아하는 것은 첫째, 현인 선생님이 오래 건강하게 활동하셔서다. 둘째로는 87년 대선과 연관이 있다. 전두환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 받은 노태우 후보는 군바리 아닌 댄디한 이미지를 꾸미느라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휘파람까지 곁들인 애창곡 베사메 무초였다. 관훈토론회에서 그렇게 밝혔다. 박정희의 황성옛터보다는 뭔가 그럴 듯 하잖아. 외국말도 들어가고.

서양말 써야 있어 보인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그 세대가 베싸메 무초를 원어로 이해하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데 오백 페소를 건다. Besame Mucho, 영역하면 Kiss me much. 대통령 후보씩이나 되어서 우째 남사스럽게 내 입술 열라 빨아줘~ 이런 가사를 입에 담을 수 있다는 말이냐.

아마도 현인 아저씨처럼 베사메 무초를 초대 주한 미대사를 지낸 무초 집안의 딸이름으로, 살로메의 자매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번안가사를 보면 그리 짐작된다. 이쯤하여 한글 가사로 불러보는데,

베사메 베사메 무초
고요한 그날 밤 리라 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 무초
리라 꽃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베사메 무초야 리라 꽃같이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 무초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 마리아….

여기서 리라꽃이 스페인어(lila)로 라일락꽃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따져보면 베사메 무초가 라일락 꽃 향기 흩날리던 날(윤형주, 우리들의 이야기),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이문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으로 이어지는 라일락 연가의 원조인 셈이다. 학창시절 친구놈에게 속아서 라일락 이파리를 씹고 사랑의 쓴맛을 간접경험해 본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별로인 노래들이지만.

멕시코의 콘수엘로 벨라스케즈가 사랑에 막 눈을 뜬 소녀의 감성으로 작사작곡하여 1940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워낙 많은 가수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전세계에서 불려졌다. 원곡의 가사에는 라일락의 라자, 리라의 리자도 나오지 않는다.
좋은 봄날에 노래 하나 가지고 말이 길었다. 뭘 하나 알면 제대로 뜸들여 소화해서 내놓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잘난 체 아는 체 하기 급하다. 이게 다 콩알 하나라도 나눠먹겠다는 좋은 뜻으로 해석하는 독자분에게 복있을져.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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