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시간은 참 더디게 흐른다. 경칩, 춘분 다 지내고 마음은 이미 봄의 한가운데를 거니는데 주변에선 좀처럼 봄 빛깔을 찾기 어렵다. 북상하던 꽃 소식은 변덕스러운 꽃샘추위에 주춤거리고, 개화가 빠를 거라는 예보에 축제를 앞당겼던 지역은 주인공 없이 잔치를 여는 낭패를 겪었다. 그럼에도 계절은 어김이 없어 경기도 산골짜기에도 꽃은 피고 축제가 열렸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이천 백사면과 양평 개군면의 산수유마을은 지난 주말 봄꽃 축제를 마무리했다. 잔치는 끝났지만 망울을 터트린 꽃송이는 이번 주말까지 화사한 빛깔을 뽐낼 것으로 예상된다.
■여섯 선비의 우정이 꽃피운 이천 산수유마을
마을에 닿기도 전에 노란 꽃물결이다. 이천시 신둔면에서 백사면 산수유마을로 가는 왕복 2차선 도로엔 산수유가 가로수로 심겨 있다. 아직 어린나무라 풍성하지 못하지만 햇살을 받은 꽃송이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노란 꽃물결은 점점 진해진다. 차례로 경사리, 도립리, 송말리를 거치는데 그중에서도 도립리가 중심이다. 이맘때면 상설 주차장으로 모자라 도로 건너편에 임시 주차장까지 마련한다.
산책로는 주차장에서 도립리 마을을 거쳐 원적산 자락으로 연결된다. 아쉬움이 남는다면 원적산(564m) 정상까지 등산을 해도 되고, 마을 길을 따라 경사리와 송말리까지 걸어도 좋다.
도립리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영축사라는 작은 사찰이 보인다. 마을 어귀 평지에 자리 잡은 사찰이라 산문이 따로 없고 새 건물인 듯 깔끔한 대웅전과 마당의 9층 석탑이 돋보인다.
2년 전 지진으로 무너진 미얀마의 어느 절에서 수습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석탑을 세웠다는 설명으로 보아 아직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찰로 보인다.
마을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몇 그루가 호위하는 ‘육괴정’이라는 한옥이 중심을 잡고 있다. 정자는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난을 피해 낙향한 엄용순이 세웠다. 처음에 초당으로 지었는데 후대에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팔작지붕 본당과 이를 둘러싼 담장과 대문까지 설치했다. 겉모습은 정자가 아닌 사당의 형태다.
엄용순은 정자를 세우고 당대의 선비였던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다섯 벗과 함께 연못 주변에 각자 한 그루씩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육괴(六槐)는 바로 여섯 그루 느티나무를 의미한다. 정자 앞과 좌측에 뿌리내린 두 그루가 오랜 세월 그들의 우정을 기리고 있다.
산수유도 이들이 심기 시작했다고 전해져 마을에선 일명 ‘선비꽃’으로 불린다. 일부 옛 담장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을 골목을 지나면 뒤편 언덕에 시춘목(始春木)과 이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봄에는 선비의 상징인 노란 꽃, 여름에는 향기 나는 잎, 가을에는 자수정 같은 열매, 겨울에는 마디마디 아름다운 눈꽃 나무’. 뻔한 문구지만 화사한 봄 풍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쏠쏠하게 돈벌이를 안기는 나무와 그 나무를 심은 선현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겨져 있다.
경사리와 송말리까지 세 마을을 합하면 어린 묘목에서부터 수령 500년에 이르는 것까지 1만7,000여 그루의 산수유가 심겨 있고, 159개 농가에서 연간 약 2만 ㎏의 열매를 생산하고 있으니 효자 나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마을 뒤편 산자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본격적으로 산수유 군락이다. 층층이 계단밭이 이제는 나들이객을 위한 공원으로 꾸며졌다. 샛노란 꽃송이가 구슬처럼 다닥다닥 붙어 노란 꽃그늘을 드리우고, 군데군데 삼각지붕 오두막 쉼터와 벤치가 놓여 있다. 꼭대기에는 커다란 그네를 설치해 놓았는데, 방향이 꽃 군락이 아니라 조금 생뚱맞다.
인근의 반룡송(蟠龍松)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다. 도로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평평한 들판에 몸을 바짝 붙여 옆으로 넓게 퍼진 소나무 두 그루가 보인다. 용의 기운이 서린 소나무라는 이름처럼 지상 2m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고 있는데, 서로 꼬이고 휘며 자란 가지가 볼수록 기묘하다. 안내판에는 ‘신라 말기 승려 도선이 장차 난세를 구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심은 소나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수령 500년으로 추측된다는 설명과 상충된다.
■파사성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 물줄기
이천 산수유마을과 양평 산수유마을은 약 18㎞ 떨어져 있다. 그 사이 여주 땅을 거치고 남한강을 가로지른다. 금사면에서 이포대교를 지나 대신면에 접어들면 한층 넓어진 강줄기 바로 옆 산등성이에 파사성이 있다. 해발 230m 산 정상과 계곡을 감싸는 형태로 쌓은 둘레 936m 산성이다.
명칭에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80∼112년 재위)이 들어 있어 당시에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신빙성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 결과로는 성벽의 축성 방식과 구조, 성돌을 다듬은 방법 등으로 미루어 6세기 중엽 이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처음 쌓았고, 임진왜란 때 보수를 거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사성은 문헌상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산성(故山城)’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 이후 17~19세기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1999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성벽의 최고 높이는 약 6.5m, 상단 폭은 최대 7.2m에 이른다.
파사성은 높지 않지만 주변에 큰 산이 없어 정상에 오르면 양평과 여주 일대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남한강 물길로 침입하는 외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이다. 강 맞은편에 현재는 터만 남은 이포나루가 있다. 충주에서 여주, 양평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남한강 수운의 요지였으니 군사와 물류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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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