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이 전하는 말

2024-04-18 (목)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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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는 한국에서 태어난 45세 남성이다. 젊어서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다리가 안으로 휜 O자형이다. 어린 나이부터 공사판에서 무거운 벽돌 나르기, 지붕 위로 기왓장 날라 올리기를 하면서 두 다리가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탓이다. 두세 살 무렵 놀이공원에 갔다가 아빠 손을 놓쳐 미아가 되었다. A가 아직도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눈부신 봄날의 공원 풍경, 아빠가 사준 빨간 풍선, 그리고 자기가 입고 있던 짧은 바지.

A는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하도 매를 맞는 바람에 도망쳐 나온 뒤로는 거리에서도 지내고 다리 밑에서도 지냈다. 그래도 일을 놓친 적은 없는데 주로 공사판 아니면 연탄 배달을 하면서 살았다. A는 성실하다. 부모가 자기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상심하였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자신이 유명해져서 부모가 알아보고 찾아오게 될 어느 날을 그린다. 그 생각을 하면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다. 훌륭한 일로 유명해져서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주고 싶었는데…

나는 아주 오래 전 미국 상담기관에서 A를 만났다. 그는 정부보조 푸드 스탬프 혜택을 알아보기 위해 기관을 찾아왔다가 다른 스탭에 의해 나에게 소개되었는데 우울증이 걱정된다는 소견이 적혀있었다. 그날 A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찌어찌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데 여전히 막노동을 하느라 사는 게 힘들다. 그 당시 갑자기 몸무게가 15파운드 이상 줄었고 사는데 아무 의미가 없어서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다. 우울증 및 자살위험 진단에 필요한 프로토콜에 따라 언제부터 그렇게 흥미와 의욕을 잃었는지 물었다.


“하루는 플러밍 공사 현장에서 수도관을 고치느라 땅을 파고 있었어요. 무척 더운 날이어서 아침부터 땀이 뻘뻘 흘렀죠. 한국인 집주인 아저씨가 시원한 얼음물을 가지고 나와서 내 손에 컵을 쥐어주며 수고한다 말하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내 아빠가 떠올랐습니다.” A가 그날 일을 마치고 밤 깊어 기진맥진 하숙방에 누워있을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린 시절 아빠 손을 놓친 건 자신이 아니라 아빠가 일부러 손을 놓았었다는 거부할 수 없는 느낌.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그 기억. 수십 년이 지난 그날 밤 이불 속에서 가만히 자신의 빈손을 꺼내 그때의 기억으로 회귀하였을 때 허전한 빈손은 아빠가 슬그머니 놓아버리던 때로 돌아가 생생하게 그 장면을 기억해냈다. A는 덧붙였다. “더 이상 설명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날 알게 되었습니다.”

손의 언어!

손은 말을 한다. A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손. 두근두근 처음 잡아본 이성 친구의 손, 그의 손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던 순간 온몸의 떨림으로 이어지던 손끝 세포의 진동. 아이의 아픈 배를 쓸어주던 어머니의 손. 손으로 전해진 의미는 우리 기억 속에 살아있다. 심리학에서는 손의 언어에 주목한다. 손을 연구한 스미소니언 연구소 네이피어박사는 말한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감추도록 만들어졌지만 손의 언어는 그것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졌다.” 말로는 자신의 깊은 속셈을 감춘 채 포장된 표현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손짓, 손 모양, 손의 움직임은 속일 수가 없다. 화를 감추려고 천연덕스럽게 얼굴 표정을 지어도 손은 동요한다. 거짓말 할 때, 스트레스로 긴장할 때 손은 오그라든다.

지금까지 우리의 손은 얼마나 많은 참과 얼마나 많은 거짓을 말했을까. 움켜쥐고, 쓸어 담고, 골라서 내버리는 일에 열중했던 손. 이제라도 쓰다듬고, 안아주고, 퍼주는데 더 많이 쓰이기를 소망한다.

www.kaykimcounseling.com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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