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읽은 명작-2020 스물스물 <최은숙 시집/ 시와 시학>

2024-04-16 (화) 권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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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신호등에 입힌 사유의 옷

내가 읽은 명작-2020 스물스물 <최은숙 시집/ 시와 시학>
붉은 신호등마다
꼭꼭 멈추다 보니

붉은 장미 앞에서도
문득 멈추게 된다

이제는
붉은 신호등만 바라보고 있어도
당신에게
장미를 보내고 싶다


(시집 2020 스물스물, 시와 시학)

최은숙 시인은 촌철살인의 짧은 시를 쓰는 시인이다. 의표를 찌르는 단 몇 줄의 절제된 짧은 시로 우리를 놀라게도, 웃게도 한다.
시 ‘신호등’은 단순한 얼굴이 아닌 겹 얼굴을 지녔다. 3연 8행의 간결한 짧은 시지만 읽어내기에 따라 다른 얼굴이 된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깊이 물들어버리는 중독성에 관한 시로 읽히기도 하고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긍정의 힘을 솎아내는 시로 읽히기도 해 상반된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시란 이렇게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여러 겹의 얼굴을 지닐 때 바로 그 다양성 때문에 좋은 시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독자의 경험 세계에 따라 변형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붉은 신호등마다/꼭꼭 멈추다 보니//붉은 장미 앞에서도/문득 멈추게 된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은 거리의 붉은 신호등만이 아니다. 우리 삶에는 붉은 신호등이 곳곳에 있다. 그 신호등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엔가 몰입해야 한다. 가난, 경쟁, 병마, 신분상승, 외로움 등등 우리가 기웃거리는 길목마다 앞을 가로막는 신호등이 있다. 그 신호등을 피해 달아나 거기서 탈출하려고 무언가에 매달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되고 마는 현실, 시인은 그런 과정들을 행간에 보이지 않게 부려놓고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신호등마다 꼭꼭 멈추다 보니 붉은 장미 앞에서도 저절로 멈추게 된다고만 간결하게 말한다. 그 중독성에 대해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4행을 통해 우리는 벌써 중독의 무서움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붉은 신호등만 바라보고 있어도/당신에게/장미를 보내고 싶다

이 3연이 있기에 중독된 상태를 희망으로 바꾸는 긍정의 힘을 본다. 붉은 신호등만 보고도 당신에게 장미를 보내고 싶다면 신호등은 그 붉은 빛만으로도 연인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붉은 신호등에서 연인을 보는 반전, ‘당신에게 장미를 보내고 싶다’ 고 말하는 화자가 참 어여뻐 보인다. 그 딱딱하게 부릅뜬 감시의 눈을 보면서 단지 그것이 붉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에게 장미를 보내고 싶다니.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긍정과 반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중독성과 그것을 벗어나는 긍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사유의 폭을 짐작케 한다. 사유의 폭은 시인 혼자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깊고 폭이 넓을수록 시를 읽는 독자는 그 행간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니 이 시에서 사유 없는 시에 대한 경고를 읽어낸다면 더 좋을 것 같다.

강은교 시인은 시가 사유이던 때가 없어졌다고 한탄했다. 시를 음악보다도 더 음악이게 하고 그림보다도 더 그림이게 하는 것이 사유라 했다. 사유의 형상화가 시에서 작동해야 하는데 사유는 간 곳 없는 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최은숙 시인은 신호등 붉은빛에 장미라는 사유의 옷을, 빌려온 옷이 아닌 온전히 시인이 지은 옷을 입혔다. 장미의 옷을 입혔을 때 신호등은 나를 멈추게만 하는 경고등이 아니라 장미꽃 앞으로 나를 데려가 멈추게 하고 당신에게 장미꽃을 보내고 싶은 긍정의 마음을 데려온다. 사유는 이런 옷을 시의 몸에 입혀주는 것이다.

하마터면 나아갈 길을 멈추게 하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멈추게 하는 신호등에 그칠 뻔했지만 거기 사유의 옷을 입힐 때 장미가 나타나고 장미꽃을 당신에게 바치게 되는 기막힌 반전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깊은 사유 안으로 들어가 명징해질 때까지 기다려 그 언어에 맞는 사유의 옷을 입혀줄 때 매력 있는 시가 된다. 사유가 없는 시는 울림도 여운도 없다. 그러니 끌리지 않는다.

최은숙 시인의 ‘신호등’에서 사유가 우리를 어떻게 시로 끌어들이는지 시에는 어떤 힘이 있는지 보았다. 사유란 시를 물결치게 한다. 걷고 뛰고 움직이게 한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사유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일. 광맥을 찾아 산을 뚫는 것처럼 사유를 뚫고 들어가 빛나는 숨은 언어를 캐오는 일, 시인 말고 누가 하겠는가.


내가 읽은 명작-2020 스물스물 <최은숙 시집/ 시와 시학>

권귀순
●‘펜과 문학’ 등단
●시집 ‘오래된 편지’ ‘백년 만에 오시는 비’
●가산문학상 시 부문 수상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배정웅 문학상 수상

<권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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