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씹는 문화’와 법치의 딜레마

2024-04-16 (화)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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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끝났다. 엎치락뒤치락 ‘손흥민 축구’ 다음으로 재미있었다는 사람도 있다. 해프닝이 이어졌다. ‘대파 일생’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유세 현장 곳곳에 대파가 등장했다. 지난 주 끝난 한국 총선 이야기인데, 모처럼 정치적 에너지가 마음껏 분출된 시간이었다.

여야 의석 비율은 총선 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통령 거부권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준엄한 민의가 확인되고,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서 앞으로 정국의 흐름은 섣불리 점치기 어렵게 됐다. 이번 선거도 하나의 선거일뿐이다. 3년 뒤 본선 같은 대통령 선거가 있다. 그 때는 또 누가 이길지 모른다. 시계추는 좌우로 흔들리지만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한 사회의 발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지고, 이기면 당장 나라가 결딴 날 것 같은 호들갑은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말이다. 토대에 올라선 나라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요즘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짚어 볼 대목은 있다. 우선 재외선거-. 이번에도 2박3일 걸려 한 표를 행사하고, 8시간 비행기 타고 와서 투표했다는 이야기가 무슨 미담처럼 전해졌다. 부끄러운 보도인 줄 알아야 한다. 문제의 핵심에 무지하거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200만명 가까운 재외 선거권자 중 투표한 사람은 10만명 미만이었다. 투표율이 5%가 안됐다. 세계 115개국에 설치된 투표소는 220개에 불과했다. 직접 가야 투표할 수 있다. 한 표를 던지기 위해 국경을 넘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영주권자는 물론, 잠시 외국에 나와 사는 지상사원, 유학생도 마찬가지였다. 우편 투표가 보통인 여기서 보면 말이 되지 않으나 이 제도는 앞으로도 굳건히 사수될 것이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말이 앞서고, 말 보다 중요한 것은 뒤에 드러난다. 이번 선거도 말 때문에 말이 많았다. 프랑스에 오래 살면서 프랑스 인이 된 한인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가 인상 깊었던 중 하나는 그 나라 사람들의 ‘씹는 문화’였다고 한다. 새타이어, 풍자가 문학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퍼져 있더라고 전했다. 특히 정치인을 씹고, 씹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씹는 문화’가 보편화되면 좋은 점이 있다. 이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씹히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본 한국의 ‘씹는 문화’는 수위가 높았다. 정치 평론가들 보다는 일반 시민이 쏟아내는 풍자에 기발한 것이 많았다. 아파트 촌 주부들의 새타이어도 날카롭게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절박한 정치인은 수준에 따라 터무니없는 막말을 쏟아내곤 했으나 한 걸음 물러서면 여유를 갖고 보게 된다. 이번 선거에서 본 한국의 ‘씹는 문화’에 일정 품격이 더해지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거셌던 ‘조국 신당’의 바람 중에 주목할 것은 여론조사 내내 연령대에서는 40~50대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다는 것이다. 지금 정권에 가장 거칠게 저항하는 강성 이미지의 그룹인데 그랬다. 알다시피 부모는 감옥을 가거나 감옥행을 앞두고 있는 듯하고, 의사이던 딸은 졸지에 고졸이 된 집안이다. 다른 가족과 일부 친척들도 크고 작은 편법, 불법에 연루된 것으로 발표됐다. “이들 가족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한 주부가 말하는 걸 들었다.

“이렇게 털면 아마 강남은 200% 다 걸릴 걸요” “자원봉사는 부모들이 대신해서 하고, 아이들 경력에 넣는 사람도 많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요령껏, 가능한 방법을 다해 자식을 원하는 대학에 보내려 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 입시용 스펙을 쌓기 위한 일이라면 미주 한인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 본 부모는 이걸 안다. 이들 가족만 지나치게 혹독하게 당했다는 마음이 들게 된다. 현대판 멸문, 폐족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런 미안함에다, 앞세웠던 말과는 달리 공정과는 한참 거리가 먼 지금의 권력 핵심부에 대한 분노가 더해진 것이 ‘조국 바람’의 숨은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법치의 딜레마,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대통령은 핍박받는 바람에 그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번에는 반대로 이 정권에 의해 핍박당하던 사람들이 또 이렇게 판을 엎었다. 매번 이런 일이 되풀이 돼서야 쓰겠는가? 양쪽 모두에 교훈이 되길 바란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나아갈 수 있을지 지켜보고자 한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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