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방생, 방생하세”

2024-04-01 (월) 홍효진/뉴저지보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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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자기가 하는 일이 상대를 망하게 하거나 파멸로 이끄는 행위임을 알면 죄책감을 느낀다.
문득 철부지 시절 개미를 돋보기로 괴롭히던 순간이 생각나 자신에게 움찔하는 공포가 느껴진 적은 없는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많이 지으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나보다 상대가 더 뛰어나게 잘해 그를 칭찬하고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상황에 놓이면 상대에 대한 질투가 일어나 그가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안중근 의사 추모식이 3월 26일이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라고 하지 ‘안 의사’라고 하지 않는다.
“해병대 채상병의 죽음” 사건은 다 알고 있을 터이다.


채는 성씨이고, 상병은 이름이 아닌 군인 계급이다. 한 청년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 마치 이름이 없는 자처럼 ‘채 상병’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게 보도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막연히 계급이 상병인 한 젊은 청년이 죽음을 당한 것에 슬퍼하거나 분노할 뿐이다. 죽은 자는 채 씨 일병 또는 상병 전체가 아닌 한 개인일 뿐인데, 분노하고 슬퍼하는데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자신이 채 상병과 가족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이렇게 구석 구석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며 지내고 있다.
채 상병 죽음에 대한 여와 야의 접근 모습은 물고기를 잡는 마음과 놓아주는 마음처럼 너무 다르다.

물고기를 사냥할 때는 날카로운 쾌감이 따르고, 물고기를 방생할 때는 부드러운 따뜻함이 공기로 퍼진다. 어떤 맛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지 알아야 한다.
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물고기를 잡아챌 때 느끼는 자신의 우월감과 물속으로 놓아줄 때 느끼던 생명의 소중함을 동격으로 느끼는 것은 아닌지.

사냥에서 생기는 우월감은 잔인함이요, 방생에서 생기는 기쁨은 사랑이요, 평화로움이다.
방생을 하는 이유는 증오와 전쟁 대신에 사랑과 평화가 꽃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들 길을 걷다 눈에 띈 예쁜 꽃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방생이요, 방 안에 들어온 조그마한 벌레를 죽이지 않고 밖으로 돌려보내는 게 방생이다.

하지만 방생이라 하려면 자기에게도 좋은 것을 상대를 위해 베푸는 것이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조그만 것을 베푸는 게 방생이 아니다.
미국이나 대한민국 정치를 보면 두 편으로 나뉘어 날카로운 대립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왼손이 있으면 오른손이 있고, 보수가 있으면 진보가 있기 마련이다.
동쪽이 생기면 서쪽이 생기듯 양 쪽은 늘 있기 마련이니 양 쪽이 더 이상 원수 대하듯 으르렁 하지 않도록 하려면 상대를 자기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생하는 마음인 사랑과 평화가 더욱 커져야만 한다.


여든 야든 우리나라 사람이며, 우리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한 마음이 아닌가.
그동안 방생을 하면 그 가정에 많은 복이 들어온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미움과 싸움보다 즐거움과 웃음이 더 크게 숨을 쉬게 된다며 방생을 장려해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지.

5분간 무대에 서기 위해 우리는 5시간 이상 연습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랑과 평화가 꽃을 피우려면 얼마나 많은 방생을 해야 할까?
물고기 몇 마리 놓아준다고 사회가 맑아질까?.
방생한 물고기가 사회를 맑게 하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방생하는 마음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절에서는 4월이 오면 방생을 한다.
물고기가 놓아진 자리에 작지만 파문이 생겨 퍼져 나간다.
그들의 손 끝에서 벗어나는 물고기와 파문처럼 미움보다 사랑의 고마움을 느끼고 나누는 가정과 사회가 되어 가기를 기원하며 방생을 한다.

<홍효진/뉴저지보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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