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4-03-26 (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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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르의 부활절 달걀을 찾아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미국 어디에 사느냐고 물어오면 대답하기가 좀 애매하다. 행정 거주지로 버지니아주, 그렇게 답하면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 생활권은 워싱턴 메트로폴리탄이니 그래서 편하게 워싱턴에 산다고 말한다.

워싱턴 디씨와 가깝다는 것, 스미스소니언이 있는 동네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애틀란타로 이사 가서 살아보고서야 알게 됐다. 여기서는 공짜 구경, 거기서는 그만도 못한 곳을 돈 내고 봐야 했다.

스미스소니언만 찬찬히 돌아가며 보아도 부족함이 없기에 관심 밖에 있던 버지니아 미술관(Virginia Museum of Fine Arts; VMFA)을 찾아간 것은 지난 2011년 피카소 순회전 때문이었다. 리치먼드까지 트래픽을 감안하면 편도 세 시간, 왔다 갔다 장난이 아니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힘들게 대서양을 건너야 제대로 피카소를 볼 수 있기에 하루를 온전히 바쳤었다.


전시는 기대에 부족함이 없었고 특별전시장의 피카소를 보고나서 이왕 온 김에 둘러본 본관은 본전 만큼이나 푸짐한 덤이었다. 고대 그리스, 이집트, 인도 유물에서 중세 성화, 르네상스, 근대 유럽회화,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 갖출 걸 다 갖추고 있다. 한국 불상, 일본 판화, 아즈텍, 미국 원주민…. 아담한 사이즈의 뉴욕 메트로폴리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후 진시황의 병마용 전시회로 다시 찾아가고 그때도 상설 본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친근한 근대유럽 회화들에 미국의 싸전트, 로스코, 오키프 등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가당 소장품목 수는 많지 않고 대표작이라 할 작품들은 아닐지 몰라도,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답니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맛보기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딱이다.

그게 다냐? 아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약장사에 들어가는데, 버지니아미술관이 자랑하는 컬렉션이다. 그 첫번째가 파베르제(Faberge) 및 러시아 공예품 섹션이다. 러시아 황제 짜르의 부활절 계란으로 유명한 보석세공가 파베르제의 작품이 본향 페테르스부르크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프랫이라는 버지니아 출신 기업가의 부인이 평생 수집한 2백여 점의 파벌지(미국 아줌마 발음)가 전시실 다섯개를 꽉 채우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의 호프 다이아몬드 코너만큼이나 볼 만했다. 아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저거 하나…. 하실까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바로 영국 은식기(English Silver) 컬렉션이 이어진다. 한마디로 번쩍번쩍 블링블링. 기증자는 뉴욕사람이나 영국에 대한 동경심이 특히 진한 이곳에 왠지 잘 어울린다. 미국 식민지 개척의 원조인 버지니아는 영국 시민혁명 당시 왕의 편에 섰다. 당시의 별칭 왕당파 캐벌리어스(Cavaliers)가 버지니아주립대의 운동팀에 여전히 쓰이고 있다. 역사를 몰랐을 적엔 까발려, 그게 뭔가….

영국스러운 전통은 회화 소장품에서도 드러난다. 말 타고 하운드 앞세워 여우 사냥하는 주제의 그림들과 말머리 조각들로 큰 전시공간을 채우고 있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말의 고향은 텍사스가 아니고 버지니아다. 켄터키가 인정 않겠지만. 영화 자이언트에서도 버지니아에서 말을 구하려는 대목이 있다.

이렇게 열심히 약을 팔아도 하루 내서 여기를 찾아가는 게 쉽지 않은 걸 잘 안다. 그래도 부활절을 맞아 가볼 만한 곳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상설관은 입장 무료. 미술관 안에 꽤 괜찮은 카페와 식당도 있다.
주소 200 N Arthur Ashe Blvd.,
Richmond, VA 23220
https://www.vmfa.museum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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