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가 읽은 명작-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 <강용흘 지음>

2024-03-26 (화) 임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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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터와 솔향기 그윽한 문학의 숲

내가 읽은 명작-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 <강용흘 지음>
최근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이기도 하고 미국인이기도 하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이민 1 세대는 세 명 중 한 명, 1.5 세대 이후는 두 명 중 한 명이라 한다.
이중 정체성을 조화하려 현수교(懸垂橋)처럼 살아가는 나에게, 푸른 언덕이 되어 줄 미주 최초의 아시아계 작가를 찾았다. 워싱턴 DC의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의 ‘20세기를 빛낸 미 언론인 전당’에 등재된 강용흘(1898?-1972)이다.

함흥 영생중학교 출신인 그는 3·1운동 참여 후인 1921년, 단돈 4달러와 셰익스피어가 담긴 가방을 들고 미국에 와서 보스턴대학에서 의학을, 하버드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했다.

그가 뉴욕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때 동료 교수였던 토마스 울프는 강용흘의 초안을 스크리브너 출판사의 전설적인 편집자 퍼킨스에게 전했다. 토마스 울프를 비롯,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퍼킨스의 세아들’로 불렸고,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후 500달러의 선불 수표를 받고 출간된 『초당(The Grass Roof)』(1931)은 한청파(韓靑坡)를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 영문 소설이다. 그의 유년 시절부터 일본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황폐해진, 조선의 3·1운동의 경위와 독립선언문의 영어 완역본을 수록한 『초당』은, 두 번의 ‘구겐하임(Guggenheim)상’과 ‘금세기의 책(The Book of the Century)상’을 받았다. 또한 독일·프랑스·유고·체코 등 1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조선 독립의 의지를 미국과 유럽 전역에 알렸다.

이후 청소년을 위해 『초당』을 축약한 『The Happy Grove (행복한 숲)』(1933)과 초당의 후편인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 (East Goes West: The Making of on Oriental Yankee)』(1937)가 출간되었다.

특히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는 1924년 아시아계 이민을 금지한 (Johnson-Reed Act) 법안으로 인해 망명자의 신분으로도 ’구겐하임상’으로 받은 창작기금으로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연구하며 집필한 작품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새로운 삶에 뛰어들었다. 화성처럼 낯선 땅 위를 떠돌며 망명자의 영혼을 위한 뿌리, 뿌리를 찾아다녔다. … 이 책은 나의 탐구의 초기 기록이자 목표를 향한 발사체의 아치다.”란 문구처럼, 뿌리를 상실한 영혼을 위해 남겨 준 그의 작품은 버터와 솔향기 그윽한 푸르른 숲이다.

학문적 성취를 위해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인종주의와 가치관의 급변을 경험한 백년 전 노정은 독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게 하는 오늘의 현실이다. 1950년대 초,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으로 시작된 FBI의 집요한 사찰로 빈곤과 싸워야 했던 말년을 선비 정신으로 이겨 낸 그는 아내 프랜시스 킬리와 한용운의 『님의 침묵(Meditations of the Lover)(1970)을 공역했다.

아쉽게도 『초당』은 품절 되었지만 영문판은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무료로 대여할 수 있고,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의 영문판은 1997년, 국역판은 2021년 재출간되었다.
1972년 겨울, 뉴욕타임스의 부고는 “『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는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요구되는 문화적 통합의 요구와 위험성에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선을 던진 작품으로, 아시아계 미국 문학으로서가 아닌 미국 문학의 걸작이다”라고 했다. 백년 전 K-문학 세계화의 길을 연 그가 “나는 마치 불사조처럼 불길 속에서 깨어났다”라고 한 것처럼 다시 깨어난 강용흘의 명작들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내가 읽은 명작-동양선비 서양에 가시다 <강용흘 지음>

임정현

서울 출신. 메릴랜드 주립대 글로벌 캠퍼스(UMGC) 졸업 및 조지 메이슨 대학교 재학. 미국 공무원 및 (PB) 퍼스널 뱅커로 일함. 2018년 워싱턴 문인회 신인 작가상 수상. 2023년 제18회 세종작문 경연 대회 영어 시조 부문 공동 3등과 제3회 세종국제 (영어) 시조 경연대회에서 공동 차상 수상.

<임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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