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벤 자카이는 왜 야브네 아카데미를 세웠나’

2024-03-25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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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68년부터 유대-로마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즈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맥없이 분열하여 강경파와 온건파, 두 파로 나누어졌다. 강경파의 세력이 더 우세하여 유대의 군대는 치열하게 로마 군대를 괴롭혔다.

70년이 되자 로마의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갑자기 강경해 졌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이제 예루살렘의의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때 랍비 벤 자카이(Ben Zakkai)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 야브네 아카데미(Yavneh Academy)를 세움으로 꺼져가던 예루살렘에 서광의 빛을 비춰주었다.
(폴 존슨의 ‘유대인의 역사’ 중에서)

이스라엘에게 주후 70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패배이고 다른 하나는 승리이다. 벤 자카이는 그 당시 존경받는 랍비였다. 랍비 자카이가 느닷없이 죽은 사람을 가장하고 나무 관에 누웠다. 그 관은 철통같은 로마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성문을 무사히 탈출했다.


랍비 자카이는 즉시 로마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나 한 가지 담판을 했다. 그 담판은 예루살렘를 훼파한 후에라도 서쪽 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 야브네에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단순한 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별 생각 없이 이 청원을 허락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야브네 아카데미는 약속대로 창립되었다.

침략자 로마 군대와 대항하여 싸우지 않고 몰래 도망 나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항복한 후 작은 학교 하나 설립했던 벤 자카이에게 쏟아진 평가는 ‘배신자’, “기회주의자‘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변방에 숨어있던 수많은 유대 청년들이 시골 마을 야브네로 구름처럼 몰려들자 그는 일약 이스라엘의 구원자요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당시 랍비 벤 자카이는 세계 역사의 흐름에 정통했다. 랍비 벤 자카이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 각 나라로 흩어질 것을 내다보고 교육으로 깨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스라엘이 큰 고난과 시련을 겪는 고비마다 도약의 돌파구가 된 것은 야브네 아카데미 덕분이다.

야브네 아카데미에서 랍비 벤 자카이는 오전에는 토라와 기도를 가르쳤고 오후에는 문,사,철(文,史,哲)과 첨단과학을 가르쳤다. 야브네 아카데미는 이스라엘 도제식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야브네 아카데미 덕분에 가난한 자, 귀족이나 농민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인재가 배출되었다. 후대의 유대인들은 집단지성의 형성에 대해서 놀랐다.

랍비 벤 자카이는 ‘거대한 로마 제국이 세계를 움직이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유대인이 개인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특별한 백성으로 유다 백성이 살아남을가’에 초점을 두고 살았다.

A/G 뉴욕신학대학(원)이 창립 46주년을 맞이한다. 설립자는 김남수 원로목사이다. 1970-80년대에 물밀듯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한민족의 대이동을 바라보고 김남수 원로목사는 야브네 아카데미를 닮은 신학교를 설립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경은 말씀한다.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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