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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2024-03-23 (토) 정상범 서울경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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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 센터가 세계 24개국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불만족스럽다’고 답한 비율이 59%에 달했다. 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들이 국민들의 생각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응답도 74%에 이르렀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정쟁에 매달려 민생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반면 강력한 지도자가 입법부·사법부 등의 견제를 받지 않고 정책을 결정하는 정부 체제에 대한 선호도가 크게 높아졌다. 퓨리서치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독재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주의 모범국으로 칭송받던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올 11월 치러질 대통령 선거 레이스에 돌입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명성과 달리 심각한 국론 분열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선거 유세에서 “내가 올해 대선에서 지면 미국 전체가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에 맞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는 혼란과 분열, 어둠으로의 복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방을 깔아뭉개면서 선과 악의 극단적 대립 정치를 조장하는 네거티브 공세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는 자신이 집권하면 취임 첫날 ‘독재’에 나설 것이라면서 법무부 등을 동원해 비판자들을 수사하겠다고 겁박하고 있다. 그는 법의 칼날을 피하려고 공화당 의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트럼프 사당화’에 골몰하고 있다. 일찍이 국가와 사회의 운영 시스템으로 법치주의를 도입했던 미국에서 역주행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올해는 미국 등 76개국에서 주요 선거가 치러지는 ‘선거의 해’다.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가 실시되는 국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은 역설적이다. 선거가 외려 정치 불신을 증폭시키고 나라를 대립과 혼란의 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한 가짜뉴스 유포까지 판치면서 증오·혐오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4·10 총선을 앞둔 우리도 ‘난장판 선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은 기형적 제도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한 뒤 비례대표 의원들을 제명 처리해 위성정당에 꿔주는 등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가짜 개혁으로 나라를 퇴보시키는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국민을 현혹하고 정치를 희화화하는 행태다. 게다가 총선 후보들을 살펴보면 각종 비리로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폭력·횡령 전과를 보유한 인사들이 수두룩하다. 국회의원의 전문성과 사회적 약자 대표성 보완 등의 취지는 사라지고 정략과 편법만 판치고 있다. 이번 총선이 ‘범죄 혐의자들의 도피처’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온다. 선거라는 공적 공간을 활용해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의원으로 당선돼 ‘방탄’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속셈이다.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법치주의와 원칙·상식을 흔들고 조롱하는 ‘가짜 정당’ ‘가짜 민주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짜 민주주의를 바로잡는 길은 ‘법의 지배(rule of law)’다. 우리 헌법은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당법은 “정당이 민주정치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추천할 후보자를 결정한다”고 못 박고 있다. 우리 정치 현실은 과연 어떤가. 자발성이라는 정당정치의 근간은 거대 양당의 원격 조정으로 훼손되고 당헌·당규도 특정인을 위한 자의적 지배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가보조금을 받는 정당은 법과 규범에 따라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공천을 해야 한다.

이번 총선은 우리 정치를 정상화하고 국론 분열을 치유해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이를 위해 유권자들이 가짜 민주주의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무너진 민주주의와 법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극단적 대결의 늪에서 벗어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복원해 민주주의의 저력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국민들의 삶의 질은 선거 결과에 달려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정치를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선거가 나의 삶을 좌우한다는 주인의식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정상범 서울경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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