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풍랑아 잠잠하라!”

2024-03-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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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리/ GMS 선교사

10시간의 뇌수술을 마친 후, 회복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다음날 일반 병실로 돌아왔다. 수술실로 갈 때는 멀쩡했던 컨디션이 돌아올 때는 중환자가 되어있었다. 전신마취 장시간 수술의 위력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숨쉬고 먹고 움직이는 기본 활동이 힘겨운 것은 물론, 메스꺼움과 현기증으로 매순간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수술만 잘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회복의 과정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 산 넘어 산이로구나. 고지가 눈앞이라며 견디고 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면서 순식간에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놀랍게도 이틀이 지나니 입맛이 돌아오고 컨디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더 놀라운 것은 문제의 왼쪽 다리에 변화가 느껴졌다. 발목이 돌아가고 발가락이 움직였다. 뇌에서 운동신경을 누르고 있던 종양이 제거되니 다리 기능이 회복된 것이다. 거센 풍랑으로 휘청이던 마음이 어느새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가 되어 희망의 빛으로 반짝거렸다.

지난 2년여 치병의 시간동안 내 마음은 풍랑과 평화의 변덕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부끄러운 나의 민 낯이다. 처음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땐 너무 뜻밖이라 당황했지만 심장이 울렁이도록 놀라진 않았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 믿었고, 마침내 나를 부르신 이를 만난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투병의 여정이 시작과 마무리가 한눈에 보이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과정과 결말이 안개 자욱한 장거리임을 미처 몰랐다. 다왔다 싶은 순간 드러나는 새로운 장애물로 희망과 좌절, 기쁨과 우울이 예고없이 마음을 헤집고 다녔다. 두번의 수술 (개두술과 감마 나이프)이후 탈모, 불면, 기력저하가 장기화되면서 벼랑 끝으로 몰린 듯했던 비참한 나날들… 감마 나이프 후유증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발작 증세… 아찔했던 순간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겼다.

올해 초에 나름 비장한 다짐을 했다. 더이상 내 마음에 풍랑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머리 속에 아직 종양이 남아있고, 언제 어떤 증세가 나를 덮칠지 모르지만, 내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휘청거리게 두지 않으리라. 이 싸움에서 지켜야 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두려움보다 더 큰 믿음으로 내마음을 향해 선포한다. “풍랑아, 잠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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